안에서 쌓은 흔적이 밖으로 드러날 때 <힘을 내요, 미스터 리> 차승원

2019-09-20|박꽃 기자 구독하기

[무비스트=박꽃 기자]




말이 앞서는 대신 깔끔한 재료 손질과 능숙한 칼질로, 요란스럽기보다는 과묵한 태도로 주방을 지키며 뚝딱 요리 몇 가지를 만들어내는 차승원의 모습에 대중이 빠져든 건 우연이 아니다. TV 예능프로그램 <삼시 세끼>와 <스페인 하숙>으로 지난 4년간 그가 보여준 철칙 ‘시키기 대신 직접 행동하기’는 후배가 선배 세대에게, 아내가 남편에게, 자식이 아버지에게 바라는 미덕 그 자체인 까닭이다. 안에서 쌓은 흔적이 밖으로 드러나기 시작하는 나이. 일상의 습관으로 쌓아 올린 모습으로 대중을 휘어잡은 차승원이 코미디 영화 <힘을 내요, 미스터 리>로 돌아왔다. 그를 만났다.


*이 인터뷰에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아빠와 딸의 코미디로 보이는 <힘을 내요, 미스터 리>는 사실 2003년의 비극적인 사건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를 다루고 있는 작품이다.
섣부른 접근은 아닐까 굉장히 부담스러웠다. 사고에 관해 아주 상세하게 알고 있지는 못한 상황이었다. 최근 무대 인사차 대구에 갔는데 그곳 분들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참 고민스럽더라. 적어도 사건이 발생한 그곳에서는 어떤 마음가짐으로 촬영을 했다는 언급을 해야 하는데… 안 보이는 곳에서 고생해 주셔서 고맙다거나 정말 용감하셨다 같은 말조차도 어렵게 느껴졌다.

실제 희생자가 있는 사건을 다루기 때문에 더욱 그랬을 것이다. 당신이 연기한 인물 ‘철수’는 당시 사고의 후유증으로 후천적 장애를 얻게 됐다는 설정이다.

영화 앞부분에 (생각보다) 코믹한 부분이 별로 없다는 지적이 있는데 그런 이유 때문이다. (코미디 영화임에도 코믹한 부분을 많이 넣지 못한다는) 일종의 딜레마였다. 그럼에도 내 의견이나 주장을 내세우기보다는 사건을 공부하고 당사자를 인터뷰한 이계벽 감독에게 모든 걸 맡기자는 생각이었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따뜻한 사람이니 사건을 훼손하거나 이상한 쪽으로 이용하지는 않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당초 코믹 영화로 홍보된 만큼 관객은 기대한 바와는 다소 다른 방향으로 흐르는 영화에 당황할 수도 있을 텐데.

개봉 전 블라인드 시사를 거쳤다. 호불호는 있었다. 열 명 중 대여섯 분은 내가 연기한 캐릭터를 두고 굉장히 싫다는 반응을 보인 거로 알고 있다. 희화화까지는 아니지만 (전형적으로 보이는) 묘사가 싫었던 것 같다. 왜 굳이 저렇게 표현해야 하나 싶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내가 좀 더 사려 깊고 섬세하게 들여다보고 연기해야 했는데 부족했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때 그런 일이 있었고 기억해야 할 고마운 사람이 존재한다는 걸 상기시켜줘 고맙다는 의견도 많았다. 그래서 걱정을 덜 수 있었다.

감정선이 고조되는 후반부로 갈수록 영화 몰입도가 높아진다는 평가도 있다.
코미디인 줄 알고 왔다가 엄청나게 울었다는 이야기가 그래서 나온다. 영화는 어찌 됐든 뒷부분이 좋게 느껴져야 기분 좋은 것 아닌가. 결과는 뚜껑을 열어봐야 아는 거지만 그런 반응을 들으면 안심이 된다.(웃음) 무엇보다 가족이 짐보다는 힘이 되는 존재라는 걸 말하는 영화라는 점이 좋았다. 서로 전혀 도움 되지 않을 것 같던 부족한 아빠와 아픈 딸이 험난한 세상에서 밀어주고 당겨주는 관계가 될 수 있다는 희망적인 메시지를 담았다. 요즘은 흉흉한 일이 많아 인생이 뭔가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하지 않나.

지난 8월 제작보고회 당시 코미디 영화에 관한 애정이 어린 소회를 털어놨다. 한동안 더는 출연하기 싫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많이 찍었지만 이제는 그 현장이 가장 편안하게 느껴진다고 말이다.

코미디 영화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표정은 대체로 어둡지 않다. 현장이라는 게 힘든 일이 많은 곳이지만 (장르 특성 때문에) 심각해지거나 숨죽여서 행동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내가 연기를 하면 반응도 즉각 즉각 온다. 그런 점이 좋아서 그동안 코미디 영화를 많이 찍은 것 같다. 영화든 사람이든, 유머가 있는 게 좋다. 그래야 처음 만나 어색한 자리에서도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고 내 생각도 더 쉽게 전달할 수 있다.


2000년대 초반 코미디 영화로 전성기를 누렸다면 최근 몇 년 동안은 <삼시세끼>나 <스페인 하숙>처럼 요리 실력을 선보인 TV 예능 프로그램으로 친근하고 호감 가는 이미지를 쌓았다. 배우로서 득이 되는 부분일 것 같다.

영화건 드라마건 예능이건, 우리처럼 누군가의 선택을 받아야 하는 사람들에게 사랑받는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좋고 고마운 거다. (유)재석이가 언젠가 그런 이야길 하더라. 예능은 박수받고 끝나는 경우가 거의 없다고. 마지막에 가서는 이제 그만 해라, 할 만큼 하지 않았냐 하는 식이라서 서운할 때도 있다고 들었다. 내 경우에는 예능에 가끔 출연하기 때문에 많은 분이 사랑을 보내준 게 아닌가 싶다. 어쨌든 흐뭇하다. 24시간 촬영하다 보면 나라는 사람이 안 보일 수가 없다. 그 사람의 식사예절, 이야기하는 방식, 일할 때 보여주는 성실한 모습 등이 다 드러난다. 안에서 차곡차곡 쌓아온 세월의 흔적이 밖에서 묻어난 거다. 그렇지 않으면 금방 탄로 나지 않겠나. 시청자가 내 진짜 모습이나 행동에 공감해준다는 게 기분 좋았다. 내가 잘못 살지는 않았구나 싶어서.

요리하는 모습에서는 특히 중년 여성의 관심을 쑥 끌어들였다고 본다. 주변에서 당신 레시피를 따라 했다는 분들을 꽤 많이 봤다.(웃음)
아마 예전부터 요리는 여자가 해야 한다고 생각해온 분들에게는 (내 모습이) 신기할 수도 있다. 그래서 (나 대신) 다른 사람이 옆에서 요리해주는 ‘뻥’이라는 이야기도 어디선가 나온 모양이다. 하지만 (여자만 요리를 한다는) 생각은 이상하고 잘못된 거다. 칼질도 하다 보면 숙달이 된다. 정말 중요했던 건 하루에 30km를 걸어와 단 하루를 묵고 아침 8시에 다시 떠나는 사람에게 정성스러운 음식을 대접해야 한다는 마음이었다. (얼마간이라도) 돈을 받고 준비하는 건데 정성스러워야 하지 않겠나. 무조건 5시 40분에 일어나 재료를 씻고 음식 준비를 시작했다.

말은 적게 하되 행동으로 무언가를 보여주고 꽤 괜찮은 결과물까지 내놓는 모습이 시청자의 마음을 사로잡은 지점 아니었을까.
대중의 공감과 사랑이 없으면 우리 직업은 끝이다.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다. 다만 이제는, 예전처럼 아주 치열하기보다는 자연스러운 흐름을 받아들여야 할 나이인 것 같다. 크게 잘되기보다는 특별한 사건이나 탈 없이 살아가는 방식을 생각해 볼 만한 시기다. 편협한 생각을 피하고 주변을 둘러보는 여유를 가지려고 한다. 나보다 주변 사람들이 더 잘되기를 바란다.

앞으로 작품 일정은.
재난 영화 <싱크홀>, 박훈정 감독의 <낙원의 밤>에 출연한다.

사진 제공_용필름


2019-09-20 | 글 박꽃 기자 (got.park@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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