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할을 가리지 않고 웃으면서 열심히 <블랙머니> 이하늬

2019-11-11|박꽃 기자 구독하기

[무비스트=박꽃 기자]



돌이켜 보면 미스 유니버스 출신이라는 흔치 않은 경력을 달고 있던 이하늬는 예능 <사남일녀>(2014)에서 넉넉한 운동복을 입고 연신 구르기를 하거나 < SNL >(2016)에서 “헤이~ 모두들 안녕”을 무한 반복하며 대중에게 즐거움을 줬고, 동시에 자신의 매력을 정확하게 예고했다. 역할을 가리지 않고 웃으면서 열심히 일하기. 말하기는 쉽지만 실천하기는 어려운 이 긍정적인 습성은 그가 영화와 드라마를 오가는 배우로 살아가는 데 도움을 줬다. 1,600만 관객을 동원한 <극한직업>(2018)에서는 범인을 잡기 위해 달리는 형사의 떨리는 턱살을 여과 없이 보여주고, 드라마 <열혈사제>(2019)에서는 당당하다 못하게 뻔뻔할 정도의 ‘말빨’을 자랑하다가도 잘생긴 남자 앞에서는 마음이 약해지는 검사의 태도를 코믹하게 구현했다. 예능, 드라마, 영화를 오가며 호감 가는 모습을 보여준 그가 이번에는 이른바 ‘론스타 외환은행 먹튀 사건’을 다룬 고발 영화 <블랙 머니>에 출연한다. <부러진 화살>(2011)과 <남영동 1985>(2012)를 연출한 노장 정지영 감독의 신작에서 그는 야심 있는 국제 통상 전문 변호사 ‘김나리’역을 맡아 또 다른 얼굴을 드러낸다.


<블랙 머니>는 IMF 국면 이후 외국자본 론스타가 국내 금융 외환은행을 헐값에 인수한 뒤 막대한 이윤을 챙기고 떠난 미심쩍은 실제 사건을 다룬다. 작품 출연을 선택한 이유는.
나라에 이렇게 큰 사건이 있었는데 어떻게 이렇게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살았나 싶었다. (IMF 시절) 당시 워낙 나이가 어렸고, 대우가 쓰러진 것을 포함해 기업 간 인수, 합병이 너무 많았다. 외환은행도 그저 이름이 바뀐 정도인 줄로만 알았다. 70조 가치가 1/70인 1조 7천 억 원에 단순 매각됐다는 사실은 몰랐다. 이 작품을 하지 않았으면 끝까지 몰랐을 수도 있었을 것 같다.

당신이 알게 된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싶었던 건가.
우리 세대는 ‘무관심 병’이라는 게 있다. 나부터도 그게 위험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문제가 수면 위로 올라와서 어떻다저떻다 이야기를 하면 오히려 더 건강해질 수도 있는데, (외환은행 건은) 아무도 모르게 덮어졌고 그래서 진짜 아무도 모르게 된 것 같다. 이런 상황이 오히려 문제가 되지 않을까 싶었다.

영화는 실제 사건에 허구를 덧댔다. 조진웅이 연기한 검사 ‘양민혁’과 당신이 연기한 변호사 ‘김나리’도 창작된 인물이다.
작업자 입장에서는 그게 운신의 폭이 더 넓었다. 특정 인물을 빗대는 캐릭터였다면 자꾸 그 사람의 오만가지 특성이 떠올랐을 거다.(웃음) 좋은 사람, 나쁜 사람이라는 구분 없이 자유롭게 캐릭터를 구축하고 입체적으로 그려낼 수 있었던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영화가 실제와 허구를 잘 버무려져 (좋은 의미의) 상업적인 느낌을 띠는 것 같다. 관객 입장에서도 다큐멘터리처럼 묵직한 작품보다는 영화적인 재미를 느끼면서 쉽게 볼 수 있지 않을까.


정지영 감독님 역시 그 점에 가장 무게를 뒀다고 하더라. 실존했던 금융 범죄를 다루는 대신 관객이 어렵지 않고 재미있게 볼 수 있도록 하는 것 말이다.
그동안 직접적인 사회고발 영화를 많이 하셨다. 나는 감독님이 실제 이야기를 다큐멘터리처럼 담담하게 끌고 가는 묵직한 에너지가 좋았다. 다른 영화적 기법을 쓰지 않고 그런 태도를 쭉 견지하는 힘이 크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그런 의미 있는 작업을 세상에 내놓는 것뿐만 아니라 여러 사람과 많이 공유도 해야 한다는 생각이 크셨던 것 같다. 요즘에는 사람들이 어두운 영화를 보기 싫어한다는 이야기도 있고, 당신 연세가 있으시다 보니 영화가 너무 올드하게 느껴질까봐 조심스러우셨던 것 같다. 어렵지 않게, 재미있게 만들어야 한다는 말을 주문처럼 계속하셨다.(웃음)

‘김나리’는 극 후반부 중요 결정을 내리는 핵심 인물이다. 엘리트 코스를 거쳐 교육받고 월가에서 일하는 국제 통상 전문 변호사로 <극한직업>에서 보여준 털털한 형사와는 또 다른 모습이던데.
연기 순서로 보면 <극한직업>과 드라마 <열혈사제> 이후가 <블랙머니>다. 지난 두 작품에서 충족한 양기를 상쇄(웃음)해야겠고 생각하던 찰나에 <블랙머니>를 찍게 됐다. 나는 종래 이런 역할만 했었다. 한때는 왜 차갑고, 도시적이고, 이지적인 역할만 맡게 될까 하는 게 고민을 했으니까. 그런데 이제는 오히려 그런 역할을 맡을 때 사람들이 연기 변신을 했다고 한다. 사람들이 내가 했던 걸 이렇게 자꾸 까먹어줬으면 좋겠다. 오랫동안 반복해서 연기할 수 있게.(웃음)

그동안 맡은 많은 역할이 대체로 강한 에너지를 지닌 쪽이었다는 건 분명하다.
직업으로 보면 전부 ‘사’짜 출신이다. 형’사’까지 포함해서 그렇다.(웃음) 직업 때문에 캐릭터의 기본 특성에 지적이고 날카로운 부분이 있었다. 거기에 캐릭터만의 독특한 성격을 버무리면 재미있는 결과물이 나오는 것 같다. <열혈사제>의 ‘경선’은 검사이기는 하지만 푼수를 넘어 거의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일 정도로 ‘미친X’에 가까운(웃음) 역할이었기 때문에 그 점을 십분 활용해 코미디 장면에 녹일 수 있었다.

정지우 감독의 <침묵>(2017)에서 연기한 ‘유나’같은 역할도 빼놓을 수 없다. 최민식의 젊은 연인으로서 그의 딸(이수경)과 긴장감을 형성하는 대목의 강렬한 힘은 좀처럼 잊기 어렵다.
그때 한 욕은 다 애드립이었다. 수경이와 긴장감을 형성하는 신이라는 것만 정해져 있었다. 정지우 감독님은 모든 신에서 배우의 자유의사를 엄청 존중하신다. 그래서 아주 세게 대사를 해보기 시작했는데, 나도 그렇게까지 욕이 나올 줄은 몰랐다. 앞에서 (연기로) 너무 열 받게 하니까…!(웃음) 완전히 뭔가가 쏟아져 나와 폭발했다. <타짜- 신의 손>(2014)에서 한 욕도 사실 애드립이다. 평소에 많이 참는 편일수록 그런 신에서 랩 하듯이 튀어나오는 건가 싶기도 하고.(웃음)

애니메이션 <달빛궁궐>(2016)에서 ‘매화부인’역에 목소리 출연하는 등 영화계에서 다양한 활동을 보여줬다. 그만큼 떠올릴 수 있는 이미지도 다양하다는 생각이다. 많은 배우가 고정된 이미지를 바꾸는 게 어렵다고들 하는데.

나는 일을 소처럼 하는 스타일이라서 그게 그렇게까지 어렵지는 않았던 것 같다.(웃음) 워낙 여러 활동을 해서 세대나 성별에 따라 나를 기억하는 방식도 다르다. 요즘 10대는 <열혈 사제>로 나를 안다면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은 SNL에서 들려준 노래 “헤이~ 모두들 안녕”으로 날 기억한다.(웃음) 연차가 10년쯤 되고 나니 이제 알겠다. 사람들은 배우가 보여준 모습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웃음) 그러니까 캐릭터를 가리지 않고 그냥 열심히 하면 되겠다 싶다.

품고 있는 기운 자체가 긍정적이고 밝다는 생각이다.
우리 안에는 양기와 음기 두 가지가 모두 있지 않나. 어떻게 균형을 맞추고 사느냐일 텐데, 나는 웬만하면 ‘울’보다는 ’조’를 선택하려고 한다. 성향상 그게 낫다. 촬영 현장에서도 일부러 밝게 행동한다. 기본적으로 천하장사 스타일이다.(웃음) 물론 현장에서 팀워크가 중요하다는 생각 때문이기도 하다. 이제는 작업자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케미’와 시너지가 관건이다. 그러려면 작업자의 열려있는 마음과 태도가 중요하다. 혼자서 독보적인 능력을 드러낸다고 해서 작품이 잘 되는 건 아니라는 걸 갈수록 느낄 수 있다.

배우 활동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잘 헤쳐나가는 편인가 보다.
댓글 같은 건 웬만하면 안 보려고 한다. 댓글이 달리면 다 좋은 내용일 수는 없다. 전부 안 좋은 말일 때도 있다. 어느 누가 그런 걸 보고 괜찮을까 싶다. 정신이 튼튼하고 영혼의 상태가 좋을 때는 어떤 공격적인 말에 노출돼도 탁탁 쳐낼 힘이 있지만 마음이 너무 어려울 때는 그러기가 힘들다. 모두가 나만 쳐다보고 하나같이 나를 욕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대중의 사랑을 먹고 사는 사람은 더 그렇다. 하지만 이제는 많이 초연해진 편이다. 자신을 지키는 법을 터득하고 있다.(웃음) 배우 이하늬는 인간 이하늬가 아주 잘 서 있어야만 존재할 수 있는 것 같다.

중요한 말이다.

데뷔가 상대적으로 늦은 편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게 행운이었다는 생각이다. 첫 드라마를 찍은 게 28살 즈음이다.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건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이다. 출발은 늦었지만, 성인이 되고 학교까지 잘 마쳤기 때문에 여러 가지 일에 단단하게 대처해 나갈 수 있었다. 물론 어떨 때는 이유 없이 돌을 맞는다는 생각이 들어서 감당하기 어렵기도 했다. 그래서 10대나 20대 초반에 이 일을 하는 분들을 보면 안쓰러울 때가 있다. 배우는 다른 사람이 봐주는 나에게 집중하게 되는 직업이다. 내가 누구인가를 찾기도 전에 (타인의 시선이) 삶의 전부가 돼 버리기 쉽다.

유튜브 채널 ‘하늬 머하늬’를 운영하면서 대중과 꾸준하게 소통하고 있는데.

어차피 대중에 노출된 사람이니까 그들과 좀 더 잘 소통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나를 직접 노출하지 않으면 의도와 상관없이 왜곡된 정보가 전달되는 게 힘들었다. 창구를 하나 열고 싶던 차에 편안하게 시작할 수 있는 게 유튜브였다. 배우 본업을 하면서 남는 에너지로 크게 스트레스받지 않는 수준에서 운영한다. (시청자와) 드레스를 같이 고르거나, 내가 좋아하는 스쿠버다이빙 영상을 보여주기도 한다. 고래가 아기 낳는 장면을 다큐로 찍기도 했다. 취미를 열성적으로 하는 스타일이라 좀 바쁘다.(웃음) 작정하고 PPL을 붙이면 돈은 많이 되겠더라. 하지만 많은 이들과 소통하려고 만든 거라 그러고 싶지는 않다. 회사는 언제까지 적자인 거냐고 묻더라.(웃음)

앞으로의 작품 계획은.
미궁이다. 김지운 감독님의 영화 같은 드라마 4부작이 예정돼 있는데 몇 개월째 미뤄지고 있다. 내년 스케줄을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이다. 하지만 모처럼 쉬고 있어서 행복하기도 하다. 올해는 거의 쉬지를 못했다. 회사에 딱 여기까지만 일하겠다고 말하고 일정을 조율하지 않으면 휴가를 갈 수가 없더라. 사람은 참 ‘낄끼빠빠’를 잘해야 하는 것 같다.(웃음) 그래도 가능하지 않을 거로 생각했던 발리에서의 한 달 반 요가 트레이닝 덕에 많은 걸 회복했다.

마지막 질문이다. 최근 소소하게 행복한 순간은.
숨 쉴 때. 요가 트레이닝에서 큰 가르침을 얻었다. 나는 무얼 하든 애쓰는 편이다. 그러다 보면 뭔가가 (마음에) 쌓여서 반드시 탈이 나게 돼 있다. 눈에 보이지 않던 (좋지 않은) 에너지가 쌓여 있다가 툭툭 튀어나와서 내가 왜 이러지? 싶은 때가 생긴다. 과거에는 그럴 때 여행을 가든지 뭔가를 해야만 다시 행복해진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 역시 또다시 애를 쓰는 일이다. 요즘은 나를 위해 숨을 크게 세 번 쉬어 내 몸에 좋은 숨을 넣어 줄 때가 행복하다. 그건 어디서든 할 수 있는 일이라, 어디서든 행복해질 수 있다.

사진 제공_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2019-11-11 | 글 박꽃 기자 (got.park@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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