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체의 가면을 쓰고… <남산의 부장들> 이희준

2020-01-30|박은영 기자 구독하기

[무비스트=박은영 기자]


헬리콥터에 앉을 자리 없다며 중앙정보부장 김규평(이병헌)을 밀치고 부리나케 헬기로 뛰어가는 경호실장 곽상천(이희준), 어정쩡하고 어기적거리며 걷는 그 뒷모습이 얼마나 경망스러운지! 유심히 봤다면 주목할 만한 <남산의 부장들>의 숨은 명장면이다.

이희준은 덩어리 감이 필요한 캐릭터 곽상천을 연기하기 위해 25킬로를 증량했다. 덕분에 허벅지가 붙지 않아 나온 우연의(?) 결과물이라고. 목소리가 굵어지고 일어나기 힘들고 대사를 조금만 해도 숨이 차는 등 몸무게의 증가에 따라 여러 신체의 변화를 경험했다는 이희준. 그렇게 신체의 가면을 쓰고 감정의 레이어를 제거한 채 각하를 향한 충정에 불타는 곽상천으로 변모했다. 캐릭터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이 필요했다고 털어놓는 이희준은 영화 참여 전후 달라진 점에 대해 인간에 대한 이해도가 커졌다고 한다. 세상을 향한 시야를 넓히는 것과 더불어 배우라서 좋은 점이란다. ‘연기, 술 마시며 연기 얘기하기, 등산하며 연기 얘기하기’ 3종 세트를 소소한 행복이라고 꼽는 이희준을 만났다.


영화의 매력? 즉 관람 포인트를 꼽는다면.
설날 연휴에 개봉한다. 10.26을 직접 겪었거나 말로만 들었던 세대 혹은 전혀 모르는 어린 친구들이 한자리에 모일 것인데 영화를 보고 서로 대화해보면 어떨까 싶다. 그게 영화의 순기능인 것 같다. 현 중앙정보부장 ‘김규평’(이병헌), 전 부장 ‘박용각’(곽도원), 경호실장 ‘곽상천’(이희준) 그리고 박통(이성민) 네 인물의 감정 변화와 연기 보는 재미도 충분할 거다. 또 평소 영화 팬이라면 의도적인 차가운 연출에 놀랄 것 같다.

익히 아는 사실인데도 보면서 눈을 뗄 수 없더라. 어떻게 봤나.
참여한 배우가 아닌 영화를 많이 봐온 이희준의 눈으로 처음 기술 시사를 통해 봤을 때는 좀 더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언가 결정적인 장면에서 더 깊이 들어가거나 과거 회상 장면이 음악과 함께 깔리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래야 관객이 더 이입하고 몰입할 거 같았고, 뜨겁길 기대했는데 예상보다 차갑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두 번째 보니 생각이 달라졌다.

어떻게 변했나.
의도된 차가움이 보이면서 너무 좋았다. 엔딩의 경우도 정반대의 입장을 표명한 당시 뉴스를 병렬식으로 제시한다. 오롯이 관객이 판단하도록 질문을 던지는 거지. 한쪽으로 치우치거나 흔들리지 않고, 냉정하게 연출하려 한 의도가 읽히면서 소름 끼쳤다. 당시 성민 선배는 처음 본 거라 그 반응이 궁금했는데 양말을 언급했었다.

나 역시 양말을 부각한 점이 인상적이었다.
전직 박용각과 현직 김규평 모두 권력을 쥐락펴락했던 이인자인데 당황한 나머지 신발도 없이 양말만 신은 채 맨땅을 밟는다. 애절함을 강요하지 않으면서도 권력의 무상함을 효과적으로 투영했다고 본다. 우민호 감독님의 전작 <마약왕>의 뜨거운 연출과는 정반대다. 감독님이 원래 뜨거운 분인데 본인의 성격과 다른 차가운 결로 가려고 얼마나 애썼는지 절감한 대목이다. 덕분(?)에 이번에 전혀 애드립을 못 했다. 모든 걸 대본에 있는 그대로 했다.

온전히 대본에 충실하게 연기하니 어떻든가.
새로운 경험이었다. 평소에 애드립하는 것을 좋아해 몇 번 했으나 다 컷 당했다. 나중에 조용히 안 하는 게 좋겠다고 하시더라. (웃음)

‘곽상천’(이희준)은 일명 단무지(단순 무식 지랄)의 전형처럼 행동하고 대사 역시 호통과 막말로 천편일률적인 편이다. 오히려 인물을 표현하기 힘들었을 것 같은데 연기 주안점은.
무식하기보다 자기 신념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사람이라고 하자. 그간 레이어를 지닌 인물을 주로 했기에 이번처럼 레이어를 제거해야 하는 작업이 다소 어색했다. 곽상천이 똑바로 하라는 건 정말 똑바로 하라는 의미로 그 이상 다른 뜻이 없다. 평소보다 감정을 제거한 연기가 뭔가 불안하면서도 시원하고 동시에 어딘가 허전하더라. 초반에는 이게 맞나 싶었지. 하면서 이 캐릭터는 그렇게 나가야 한다는 걸 알았다. 그가 선배인 ‘김규평’을 향해 소리 지르고 함부로 대하는 것은 오로지 각하를 위한 충정에서다. 어찌 보면 극 중 가장 순수하고 개인적인 욕망을 거세한 인물일 수 있다. 그는 절대로 일인자를 꿈꾸지 않지 않나!

그의 심리와 언행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밝힌 바 있다.
처음엔 쟁쟁한 선배와 함께한다는 생각에 신났고 대본이 재미있어 좋았는데 막상 연기하려니 곽상천이라는 인물이 전혀 이해가 안 됐다. 어느 정도 공감이 돼야 연기하는 데 말이지. 캄보디아 독재자 누구는 군중 수만 명을 쓸어버렸는데 뭐 어떠냐는 식의 발언과 선배인 김규평을 향한 하극상적인 언행이 특히 그랬다. 그래서 그가 각하와 지낸 시간을 상상하며 혼자 전사를 써보았다. 각하가 생물학적인 아버지는 아니지만, 심적으로는 아버지 이상으로 믿고 충성하지 않았을까. 그의 대사의 대부분이 윽박지르는 거지만, 왜 그렇게 됐을지 그 이유를 생각했다. 그런데도 마지막 엔딩은 공감이 안 되더라. 그렇게 목숨처럼 보필하던 각하가 위험한 상황에 처했는데 어떻게 외면할 수 있을지 말이다. 촬영 당일 아침까지 고민하고 감독님께 말하니 “사람이잖아” 이러시는데 아, 그럴 수도 있겠다 싶더라.

<남산의 부장들>

대사도 대사지만, 헬리콥터 신에서 곽상천이 김규평을 따돌리고 부산하게 헬기에 오르는 뒷모습에 개인적으로 감탄했다. (웃음) 어떻게 그렇게 경박하면서도 어정쩡하게 걸을 수 있었는지? 그것도 대본에 있던 것인가.
헬기에 탈 자리가 없다고 김규평을 놔두고 가는 장면으로 마침 첫 촬영이었다. 일부러 그렇게 걸은 게 아니고 살이 쪄서 그런지 허벅지가 안 붙더라.(웃음) 김규평을 밀쳐내고 뛰어 빨리 헬기에 오르려다 보니 그렇게 됐다. 살이 찌니 목소리도 굵어지고 허벅지도 안 붙고 일어나는 것도 힘들고, 조금만 대사해도 숨이 차는 등 몸에 여러 변화가 생겼다. 굉장히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1987>(2017)의 기자 역할이 심리적 가면을 썼다면 이번엔 신체적 가면을 쓴 거라고 할까. 어느 순간 즐기게 됐다.

캐릭터를 살리기 위해 25킬로를 증량했다. 찌우는 것도 힘들었겠지만 다시 감량하는 과정 역시 고통스러웠을 거다.
배우 시작하며 멋진 몸까지는 아니라도 나름 긴장하고 조절해왔는데 대본을 보니 덩어리 감이 필요하겠더라. 그런데 막상 살찐다고 생각하니 심리적 거부감이 들었다. 배 좀 나와도 괜찮다고 받아들이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으나 이후부터는 수월했다. 죄책감(?) 없이 마음껏 먹었지. 찌운 상태에서 영화를 끝낸 후 당뇨 위험이 있다고 해 3개월 잡고 감량했다. 중간에 의지가 약해질 것 같아 마침 잡지사에서 일하는 친구가 있어 3개월 후 표지 촬영 약속을 했다. 마지막 보름 남기고는 헬스장 앞 고시원에 들어가 닭가슴살과 고구마만 먹으며 하루 네 번 운동하고 운동했다. 배우 하겠다고 300만원 들고 대구에서 서울로 올라와 고시원 생활하던 때가 떠오르더라. 그간 참여했던 작품과 인연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갔다.

흠..(웃음)
닭가슴살 먹으며 지난 20년에 감사하는 눈물을 흘렸다.(웃음) 평소 눈물이 좀 많은 편이다. 극단에 들어가 무대에 섰고, 우연히 작가의 눈에 띄어 드라마를 하면서 인지도를 쌓았고 이후 그게 인연이 돼 또 다른 작품에 참여한 것 등등 인연이 꼬리를 물고 이어져 왔다. 그중 하나라도 없었다면 지금의 내가 아니고 여러모로 달라졌을 거다.

당신의 첫 연기가 궁금하다.
<알라딘> 연극이 처음이었다. 당시 관객이 전부 7살 내외의 꼬마들이었는데 나를 향해 나쁜 놈이라고 소리치는 데 흥분되고 좋았다. 소위 스테이지 뽕? 이라고 할까. 연기라는 게 정말 재미있구나, 한 번 해보지 싶어 다니던 공대를 때려 치고 부모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서울로 올라왔다. 그때나 지금이나 실패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 불안하고 걱정되는 순간이 있지만 중요한 것은 연기가 너무 재미있다는 거다.

캐릭터의 강렬함이나 연기를 위해 살을 찌운 노력 등 <남산의 부장들>은 당신의 필모에 큰 획을 그을 영화일 것 같다. 참여 전후 변화가 있다면.
이 영화를 하지 않았다면, 아마 주변에서 곽상천 같은 사람을 만난다면 말도 섞지 않았을 거다. 끝나고 보니 이제 일상에서 비슷한 부류를 만나면 일단 그의 주장을 들어볼 정도의 열린 마음이 생겼다. 그래서 배우가 좋다. 작품을 통해 세상을 보는 눈이 넓어지고 인간에 대한 이해의 폭이 깊어진다. 가령 <해무>(2014)에서 고기잡이 배를 탄 선원을 연기했는데 솔직히 평소 어부를 접할 일이 없다. 연기하면서 그들의 삶을 간접적이나마 느끼고 가까이 바라볼 수 있다. 물론 평가받는 게 힘들지만 그만큼 행복하기도 하다.

명장면을 꼽는다면.
마지막 차 돌릴 때 김규평의 표정이다. 거친 호흡이 가라앉기 시작하면서 선택의 기로에 놓인 얼굴이 클로즈업되고 그 안에 온갖 감정이 스쳐 지나간다. 곽상천한테는 왜 그런 클로즈업이 없었을까 욕심도 났지만, 나는 다음에 기회가 있겠지.(웃음) 곽상천이 나오는 건 ‘각하가 국가’라는 장면이다. 다른 때는 소리만 지르고 건방진 하극상을 보이지만, 그 신에서는 그의 생각과 감정이 잠깐 엿보인다. 사심 없고 순수한 충심이 드러난다.

워낙 연기 잘하기로 소문난 선배들과 함께했다. 배운 것도 많았을 것이고 옆에서 지켜보니 어떻든가.
성민 선배는 촬영 내내 계속 자료를 들고 보셨다. 단순히 머리나 기술로 연기하는 게 아니라 분노하는 국민, 참모 간 갈등, 하야 요구 등에 맞닥뜨리며 40일간 몸과 마음이 지쳐가는 데 정말 그 인물로 화하더라. 나중에는 목소리와 걸음걸이도 실제와 아주 흡사해 놀라웠다. 도원 선배는 언제 죽을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에 처한 인물의 심리를 여유와 두려움을 자유자재로 다루며 감정을 표현하더라. 병헌 형은 적당한 시간 내에 적절히 표현하는 법을 너무 잘 알고 있다. 시간과 리듬에 대한 감각이 본능적이다. 특히 마지막 장면에서 김규평이 총을 가지러 내려갔다 다시 올라와 마무리하는 신은 한 타임에 촬영한 거다. 그 신에서 나도 뭐라도 하고 싶어 총에 맞고 한마디 덧붙이니 감독님이 하지 말라면서 바로 컷 하셨다. (웃음)

차기작 소개를 부탁한다.
나문희 선배님과 함께한 <오, 문희>가 곧 개봉한다. 치매 걸린 엄마를 모시고 사는 여섯 살 딸을 둔 돌싱 보험사원을 연기한다.

마지막 질문이다. 소소한 행복 거리가 있다면.
좋아하는 것 혹은 행복한 것을 찾아보니 연기, 술 마시며 연기 얘기하기, 혹은 등산하며 연기 얘기하는 거더라. 그리고 드로잉 수준의 그림 그리기. 15년 전 일기에도 이렇게 쓰여 있더라.

사진제공. ㈜쇼박스


2020-01-30 | 글 박은영 기자 (eunyoung.park@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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