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델의 아틀리에 3편] 김태연 ③:천(千)번의 담금질, 비로소 핀 강철 꽃

2020-03-23|이동훈 기자 구독하기

[무비스트=이동훈 기자]



슈퍼모델 김태연은 서경대학교 공연예술학부 모델연기전공ㆍ예술교육원 모델학전공, 한국모델협회 이사, 아시아모델페스티벌조직위원회 조직위원, 국제모델대회 심사위원 등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여고생 시절부터 걸어온 모델의 길은 화려하고 편안한 꽃길이 아니었다. (사진 왼쪽부터 이평ㆍ김태연정다은 순)


앙드레 김의 모델로 우뚝 서기까지는 천(千)번의 좌절과 수 만(萬)번의 연습이 밑바탕이 되었다. 그리고 함께하는 동료 모델들의 우정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본지는 과거와 현재, 미래를 넘나들며 패션 유토피아를 모색하는 탐구자 ‘김태연’을 4부에 걸쳐 소개해본다.


① 코로나 못잖은 IMF때 10대모델 ‘빅5’로 각광

② 패션계 거목 존 카사블랑카스, 그녀를 보자

③ “모델, 천 번을 담금질해야 피어나는 강철의 꽃”

④ 패션 유토피아를 꿈꾸다…이매진(Imagine)


‘상처받고 다시 도전하는 천 번의 담금질, 비로소 강철의 꽃은 피어난다.’


김태연은 패션모델로서는 단점일 수도 있는 아름다운 외모를 갖고 있다. 동양화에서 빠져나온 듯 유려하고도 섬려하다. 그러나 조각처럼 예쁘기보다는 개성미가 더 주목받는 곳이 패션모델계이다.


김태연은 이를 기본기와 다양한 이미지로 커버했다. 앙드레 김 패션소에서 보였던 소녀적인 도도함과 순진함, 한복 특집화보에 깃든 애잔함, 자우림의 뮤직비디오에선 고혹적이며 무너질 듯 흐느적거리는 실루엣, 현대 퍼플카드 CF의 뇌쇄적인 퇴폐미, 대한항공 브랜드CF의 단아하면서 속깊음, KT&G 브랜드 CF에서 선보인 중성적인 분위기 등.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김태연 스스로가 이미지메이킹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전문가이면서, 숱한 실패의 과정에서 배움을 멈추지 않은 도전자이기 때문이다. 이는 너무 이른 나이에 찾아온 자성(自省)의 계기와도 무관하지 않다.


■ 상처받아도 훌훌 털고 다시 도전하는 ‘깡’


▲김태연은 슈퍼모델 입상자 모임인 '아름회', 슈퍼모델골프단의 일원으로 봉사활동에도 적극 나서고 있다. 사진은 지난해 9월 진행한 '유기동물돕기 자선 바자회'의 장면이다.


“하나의 무대에 오르기 위한 리허설 과정이 많았습니다. 오후 7시가 쇼라면 전날인 저녁 9시부터 12시까지, 다음날 아침 7시에 모여서 연습을 했죠.”


김태연은 SBS슈퍼엘리트모델선발대회 준우승 이후 1년에 300번가량 런웨이에 섰다. 일주일 사이 30번도 오른 적이 있다. 모델의 워킹을 캣워크라고 부른다. 고양이처럼 우아하고 부드럽게 걸으면서도 관객들의 시선을 끌어모을 수 있어야 하는 데서 비롯된 말이다.


옷을 갈아입고, 헤어메이크업을 고쳐 다시 무대로 나가기 위한 백스테이지에서의 준비과정은 전쟁을 방불케한다. 동료모델 스태프 등 수백명 인원과의 완벽한 호흡도 필수이다. 무엇보다 이 한무대에 서기 위해 많은 기다림과 좌절을 맛보아야 한다. 패션쇼에 있어 패션모델의 권리는 무대에 오르는 것, 그 외는 없다.


“패션모델의 일은 단순하게 정리하자면 오디션으로 시작해서, 런웨이로 끝을 맺죠. 그만큼 힘든 일이 오디션을 통해 일을 가져오는 거예요. 오디션 현장에서 3시간 기다리기는 일쑤이고, 심지어 기회조차 없는 경우도 있죠.”


김태연은 사교적인 성격이면서도 개인적인 사색과 사유를 갖기 위한 시간을 포기하지 않고, 한 가지 일에 몰두하면 끝장을 보려는 집념이 강하다. 그렇다고 야단스럽게 일을 벌이지도 않는다. 그저 후배, 제자들에게 자신의 등을 보이며 묵묵히 한발 한발 내디딘다. 높은 산 정상에 놓는 돌탑처럼 하나하나씩 쌓아 올라갈 뿐이다.


롤스로이스 엔진 같은 이 성품은 좌절과 역경 속에서도 자신에 대한 믿음, 즉 내부 깊숙이 갈무리한 신성한 자존감을 다지는 1000번의 담금질이 있었기 때문이다.


“저도 지금까지 1000번 넘게 오디션에 떨어진 것 같아요.”


김태연 본인에게 확인받은 일은 없지만, 배우의 길에 대해 선망을 하고 있었던 듯하다. 그녀는 여고시절, 공전의 히트를 친 호러영화 오디션에 응시한 적 있다. 이미 잘나가는 여고생 패션모델이다보니 1차 서류를 거뜬히 통과하고 오디션 현장으로 갔지만, 177CM가 넘는 키가 불리하게 작용했다.


이는 방송 오디션도 마찬가지였다.


“현장에서 면접보시던 분의 첫마디가 대뜸 ‘키가 무척 크다. 너가 캐스팅되서 촬영에 들어가면, 무대 높이를 전부 낮추거나 높여야겠다’라고 비아냥거리듯이 말씀하시는 거예요.”

낙엽 굴러가는 소리에 까르르 웃어대다가 눈물짓는 섬세한 사춘기 시절이다. 벗겨진 속살의 곯은 상처처럼 아프지만, 어른이 된다는 것은 ‘안되는 것은 안된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그래도 미련은 남았는지, 김태연은 1999년 동덕여자대학교 방송연예학과에 입학한다.


■ 고난과 역경 헤쳐가는 원동력 ‘동료애’


▲패션모델은 치열한 경쟁을 뚫고 생존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많은 상처를 받지만 그 때 마다 일으켜 주는 것은 동료 모델들의 헌신어린 우정이다. 사진은 2018 SBS슈퍼엘리트모델대회의 축하무대에 나서는 슈퍼모델 이선진 김효진 정다은 김태연 박둘선 송은지의 모습.


패션모델은 경계선상에 있다. 프리랜서이면서 회사원처럼 조직적인 협업을 해야 하고, 연예인이 아니면서도 매스미디어의 화려한 조명을 받는다. 이렇다 보니 모델은 혼자가 아닌 함께 성장하는 직업군이 되었다. 김태연은 타고난 상냥함으로 고교 시절부터 많은 선배ㆍ동료들의 도움을 받고, 배웠다.


“모델은 선후배의 위계질서문화가 강해요. 또한 정(情)도 끈끈하죠. 박둘선 언니가 저보다 나이는 많지만, 모델기수로는 1년 후배가 되요. 그래서 박둘선 언니가 몇 년간 저를 선배라고 꼬박꼬박 호칭해주는데 정말 어색했어요. 2년뒤 눈치보다가 제가 언니라고 불렀죠.”


김태연은 고향이 대전이다. 쇼를 준비할 때면 새벽까지 리허설을 하다 보니 집으로 돌아가지 못할 때가 많았다. 그럴 때마다 선배 언니들은 돌아가면서 자신의 집으로 그녀를 데려와 챙겨줬다.


“모델은 서로의 경쟁이 치열한 곳이에요. 일을 하다 보면 워킹과 동선이 틀리때가 있었요. 이럴 때면 (스태프로부터) 육두문자로 욕을 먹을 때가 있어요. 그 순간 위로가 되고 용기를 북돋아 주는 것은 역시 같은 동료 모델이죠.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한계까지 몰리기도 하지만, 그래도 패션모델을 계속할 맛나는 건 함께하는 동료애 덕분이죠.”


슈퍼모델인 이경은과의 에피소드는 이와 같은 모델의 세계를 잘 드러낸다. 이경은은 1998년 국내 최고의 엘리트패션모델 등용문인 SBS엘리트모델대회로 데뷔이후 줄곧 톱모델로 군림해왔다. 김태연의 1년후배이면서 1년 언니가 된다.


“경은 언니와는 CF 오디션 때마다 늘 경쟁했어요. 최종 후보자 2명이 뽑히면 그 자리에는 항상 언니가 있었죠. 이렇게 몇 년 지나니 ‘최종 면접 보러오세요’하면 ‘경은 언니가 (*태연이가) 있겠구나 서로가 생각하게 됐어요. 그리고 최종 합격자가 밥 사는 관행(?)이 생겼죠. 아~ 내가 많이 사주고 싶었는데 ㅋ”


현재까지도 둘은 가까운 자매지간처럼 지내고 있다. 2014년 이경은은 동생인 김태연이 교수로 재직 중인 서경대학교 예술교육원(당시 예술평생교육원) 모델학전공에 입학하면서, 사제지간도 맺게된다.


■ 한국패션의 전설 앙드레 김을 추모


▲신인 모델 시절의 김태연. 그녀는 SBS슈퍼엘리트모델대회 준우승을 했지만, 1000번 넘게 오디션에서 떨어졌다. 그 와중에 자신을 단련시키며 톱모델로 성장했다.


‘한국 패션사의 전설 앙드레 김이 돌아왔다’(중앙일보)


2018년 5월30일 서울 용산구 아이파크몰에서는 패션 디자이너 앙드레 김 추모 패션쇼가 열렸다. 이 무대는 슈퍼모델 모임인 ‘아름회’가 기획ㆍ주최해 국내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았다.


모델들을 취재하다보면 일반인은 이해하기 힘든 공통점이 있다. 모델은 가장 멋진 옷, 시대를 앞서가는 최첨단 멋을 선도하는 직업이라는 자부심이다.


지금은 모델테이너(Model+Entertainer) 시대라고 해서, 공효진ㆍ이종석ㆍ김우빈ㆍ안재현 등 모델출신이 연예ㆍ방송 등에서 맹활약하고 있다. 그러나 1990년대 차승원ㆍ박영선처럼 톱모델 출신 연예인이 있었지만, 여전히 런웨이에 오르는 것을 패션모델의 최고 가치로 여겼다.


이중 앙드레 김 쇼는 패션모델들 사이에서도 선망의 대상이었다. 앙드레 김은 한국의 전통문양을 아름답고 신비하게 표현해내, 국내외에서 추앙받던 패션 외교관이었다.


김태연은 앙드레 김의 전속모델로 활약해 박영선과 더불어 ‘앙드레 김의 여인’으로 불리웠다. 당연히 이날도 박영선을 비롯해 김효진 정다은 장효선 율라 박순희 이정아 이평 송은지 정경진 양은영 등 당대의 톱모델들과 함께 무대를 장식했다.


■ 앙드레 김 앞에서 창피당한 사연…“가족이 되어주셨죠”


▲ 2018년 슈퍼모델 입상자 모임 ‘아름회’에서 주최한 ‘앙드레김 추모 패션쇼’. 김태연은 앙드레 김의 전속모델로 20년넘게 활동하며 ‘앙드레 김의 모델’로 불렸다.


앙드레 김과의 첫만남이 재미있다.


“고등학교때 앙드레김 선생님의 오디션 현장으로 갔어요. 저를 보시자마자 ‘판타스틱~ 왜 이제야 왔어요~라며 대뜸 칭찬을 해주시는거에요. 그리고 워킹을 해보라고 하시는 거에요. 정말 혼신을 담은 워킹을 선보였죠. 워킹을 보신 선생님께서 ‘원더풀’ 하시는 거에요. 꿈같은 일이이뤄졌다며 감격에 겨워했죠.”


그러나 앙드레 김의 말은 끝까지 들어야 한다. 그는 “원더풀~ 퍼펙트 빵점”이라고 상큼하게 외쳤다. 쥐구멍에라도 숨고싶은 심정이었다. 창피로 빨갛게 물든 얼굴을 숙이고 도망치듯 현장을 빠져나왔다. 1998년 참가한 세계엘리트모델대회에서 존 카사블랑카스 엘리트모델사 회장으로부터 극찬받았지만, 결국 고배를 마셨던 일이 떠올랐다.


끊어질 것 같던 운명의 끈은 빠른시간에 이어졌다. 쇼 출연자중 한명이 패션쇼 전날 펑크를 내버린 것이다. 그 모델과 김태연의 이미지가 흡사했던지, 그녀에게 출연을 해달라는 연락이 왔다.


다음날 김태연을 본 앙드레 김은 이번에도 “만나서 너무 좋고, 너무 예뻐요”라고 요란스럽게 칭찬을 했다.


“전에 당한 일이 트라우마처럼 남아서, 이번에는 기뻐하지 않고 말씀을 끝까지 들었어요.”


아니나 다를까. 앙드레 김은 “태연이는 턴이 부족하니, 쇼만 해요”라고 주문했다.


“네~ 하고 대답하면서 멋쩍게 웃어 드렸죠.”


이후 김태연은 국내외를 오가며 20년간 앙드레 김의 모델로 활약한다. 앙드레 김은 부족한 실력을 향상하기 위해 노력하는 그녀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앙드레김 선생님은 20년간 친구처럼 가족처럼 대해주셨어요. 특히 지인들의 경조사를 전부 기억하고 계셨죠.”



<계속>

2020-03-23 | 글 이동훈 기자 (rockrage@naver.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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