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FX를 연필처럼 다루던 ‘기술 피디’의 진화 <초능력소년사건> 채수응 감독

2020-05-29|박꽃 기자 구독하기

[무비스트=박꽃 기자]



“‘기술 피디’라는 콤플렉스를 벗어나고 싶었다”


채수응 감독은 16분간의 체험형 VR 애니메이션 <버디>(2018)로 제75회 베니스영화제 VR경험상을 받으면서 대중과 업계에 이름을 알렸다. 그의 영화 이력은 야구하는 고릴라가 등장하는 김용화 감독의 <미스터 고>(2013) 3D 프로듀서에서 시작한다. <신과 함께> 시리즈를 만든 덱스터 스튜디오의 원년멤버로 서극 감독의 <적인걸3: 사대천왕>(2018) 특수효과를 담당하는 등 국내 영상 기술의 최전선에 서 있었고, 신기술에 관한 앎과 경험을 나누는 연사로 자주 연단에 섰다.

그가 견디기 어려웠다고 토로한 의외의 콤플렉스는, 자신이 그저 ‘기술 피디’로서만 머물고 있다는 오묘한 감정이었다. VFX를 비롯한 새로운 영상 기술을 연필처럼 능숙하게 다룰 줄 아는 실력자가 됐지만, 종종 영화 본연의 메시지보다 영화시장과 산업에 더 몰두해야 하는 위치에서 허탈함을 느꼈다. 시각적 탐미를 넘어 ‘내 작품’을 연출하고 싶다는 갈망이 커질 쯤, 중국의 투자자를 만나 <초능력소년사건>을 연출하게 된다.

‘초능력을 쓰는 순간 기억도 함께 잃게 된다’는 <초능력소년사건>의 설정은 그의 장기인 영상 기술과 그가 아쉬워했던 작품의 정서를 동시에 도모할 유의미한 기회였다. 사드 문제와 한한령으로 불거진 연출 크레딧 박탈 위기, 한 편의 영화로 여러 장르의 재미를 모두 맛보고 싶어하는 중국인의 낯선 문화적 습성, 무엇이든 해낼 것 같아 꽤 자신만만했던 그 시절의 자신까지, 모든 요소가 맞물려 빚어낸 아쉬웠던 과정과 결과물을 그는 진솔하게 복기한다.

이 과정을 채수응 감독의 ‘진화 과정’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건 기술을 갖춘 연출자로서 여러 어려움 속에서도 자신의 장편 극영화를 진두지휘하는 경험을 얻었기 때문일 것이다. 관객의 눈길을 확실하게 사로잡는 영상을 구현하는 동시에, 그들의 마음을 끝까지 붙잡아두는 쫀쫀한 이야기의 힘도 고민하게 됐다. 이 경험을 거름 삼아 도전하는 새로운 작품은, <서치>(2018)의 제작자 이고르 세이와 함께 하는 *‘스크린 라이프’ 포맷의 장편이다.

첫 장편 데뷔작 <초능력소년사건>을 선보인다. 중국에서 투자를 받아 만든 한중 합작품인데, 제작 과정이 궁금하다.

12년 정도 미국에서 영화 공부를 하다가 한국으로 와서 덱스터 스튜디오 창립 멤버로 일했다. <미스터 고> 3D 프로듀서로 일한 게 첫 번째 상업 영화 경험이다. 김용화 감독의 당시 사업전략이 좋았던 것이, (VFX 기술력을 활용하는) 우리 팀은 대한민국 영화로만은 먹고 살 수가 없으니 중국 영화도 맡아 작업해야 한다는 거였다. 마침 중국에서 활동하던 베트남계 홍콩인 서극 감독과 협업할 기회가 생겼다. 회사로서는 영어도 좀 되면서 중국으로 넘어가서 일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고, 나는 <동방불패>(1990)와 <황비홍-천하무인>(1991)을 보면서 자란 서극 감독의 팬이었다. 그렇게 차출돼 중국으로 갔다.

중국 영화계와의 인연이 그렇게 시작된 모양이다.
서극 감독과 그의 프로듀서가 나를 좋게 봐줬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작품이 있는데 넌지시 (어떠냐고) 의견을 여쭤봤더니 투자자 한 분을 소개해주시더라. 작은 영화에 주로 투자하는 분이었다. 만나서 설명을 들어보니 <크로니클>(2012)같은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손바닥에서 불이 나오는 종류의 초능력이 등장했으면 좋겠다고 말이다.(웃음)

느낌이 온다. 그게 <초능력소년사건>의 시초겠다.(웃음)

<크로니클>의 아류작을 만들기는 싫었지만, 어쨌든 투자자는 나에게 기회를 준 거다. 한 달 만에 시나리오를 뚝딱 써서 가져갔다. 초능력을 다루되 그걸 쓸수록 기억을 잃는다는 설정을 넣었다. 가능하면 특수효과를 좀 줄이고 ‘기억의 소중함’이라는 메시지를 드러내고 싶었다. 그쪽에서 시나리오를 보더니 연애 이야기가 들어가면 좋겠다고 하더라. 그건 내가 안 해본 일(장르)이라, 송은주 작가님과 같이 작업을 했다. 번역과 중국 현지 각색까지 딱 3개월이 걸렸다.

글 작업이 3개월 만에 끝난 건, 굉장히 빠른 속도다.

돌이켜 보면 자신만만하기만 했던 미성숙한 시기였던 것 같다. 아무리 영화를 만드는 일에 자신이 있다고 느끼더라도 시나리오 단계에서는 글과의 전쟁을 온전히 끝내 놓아야 한다. 지금까지도 많이 반성하고 있다.(웃음) 아마 당시에는 ‘기술 피디’라는 콤플렉스에서 너무나도 벗어나고 싶어서 그랬던 것 같다.

‘기술 피디라는 콤플렉스’는 어떤 의미인가. <넛잡: 땅콩도둑들>(2013) 캐릭터 ‘버디’를 주인공으로 한 16분 간의 체험형 VR영화를 연출해 베니스영화제에서 VR경험상까지 받았다. 한국 영화영상 기술의 품질을 끌어올렸다는 점에서 높게 평가해야 한다고 본다.
그런 일을 즐긴 건 맞지만, 어느 순간 너무 비즈니스 측면에서만 일하는 것 같더라. 처음 영화를 시작했던 분명한 이유가 있는데도 말이다. 시장의 상황에 작품을 맞추다 보면 창의성에 지장이 생긴다. 제작자 입장에서는 돈이 중요하고, 작품이 관객을 (충분히) 수용하지 못할까봐 겁을 먹는다. 그러니 (새로운 아이디어) 한 개를 통과시키려면 열 번은 싸워야 한다.(웃음) VR 시장은 아직 제작 모델이 확실하게 정해지지 않아 더 그런 것 같다. 그뿐만 아니라 그동안 영화가 아닌 바이럴 광고나 뮤직비디오 프로젝트도 78건이나 소화했다. 시각적인 탐미에 지친 건지… 삐까뻔쩍하고 감성도 있고 예쁜데 결국엔 브랜드 홍보라는 게 허탈했다. 영상 기술을 마치 연필처럼 (익숙하게) 다룰 정도의 상황이 됐으면, 이제는 내 작품을 해야 한다는 욕망이 앞섰다.

<초능력소년사건>으로 평소 원하던 바를 많이 이루었나.

이 경우에는 아무래도 중국 현지 상황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되더라. 투자자가 원하는 걸 이렇게까지 우악스럽게 다 이뤄줘야 하나 싶을 때도 있었다.(웃음) 예컨대 중국은 ‘멀티장르’에 대한 선호가 크다. 초능력, 로맨스, 스릴러, 액션, 고어까지 한 영화에 섞을 수 있다. 영화 한 편이 모든 욕구를 다 충족할 수 있도록 여러 장르를 희한하게 섞어 놓은 작품도 많다. 워낙 땅덩이가 넓어서 일단 한 곳을 방문하면 오랫동안 체류하며 모든 걸 다 해결해야 한다는 문화가 있어서 그런 것 같다. 예컨대 중국의 카페에 가면 (차만 마시는 게 아니라) 한쪽에서는 비디오를 보고 한쪽에서는 음식을 먹는 식이다.

초능력, 로맨스, 스릴러, 액션, 고어까지 오갈 수 있었다면 연출자로서는 일종의 실험적인 도전 기회를 얻었다고 볼 수도 있을 텐데.

교과서에서만 배웠던, 알레고리로만으로 이루어진 이미지 스토리텔링을 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는 생각도 물론 들었다. 장르와 장르가 서로 엮일 수 있는 상황만 잘 만들면 되는 거였다. 그 과정에서 총체적인 메시지인 ‘기억의 소중함’을 잘 보여주면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관객 입장에서는 이도 저도 아닌 결과물처럼 보일 수도 있을 것 같다. 중국에서 너무 많은 심의를 거치면서 마음이 지치는 바람에 많은 부분을 잘라낸 영향도 있다. 두 번째 편집 버전이 120분이었는데 개봉 버전은 83분이다. 너무 많이 걷어내서 더 산만해진 것 같기도 하다.

영화 촬영은 2015년 8~9월 사이에 이루어졌는데, 정작 개봉은 2020년에 하게 됐다. 심의 때문에 시간이 지체됐다고 봐도 되는 건가.
<초능력소년사건> 촬영 이후 ‘한한령’이라는 중국 정부의 암묵적인 권고사항이 돌았다. 중국 제작사, 투자사도 한국인과 일을 하면 (당국에) 보고가 되고 블랙리스트에 오른다는 소문을 듣기 시작했다. 상업 영화뿐만 아니라 독립 영화도 탄압을 받았다. 우리 영화 투자자도 나와 술을 한잔 마시면서 감독인 내 이름을 제명해야 한다고 하더라. 연출, 작가, 프로듀서 등 제작 핵심 인력에 중화사상에 나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한국인의 이름이 올라서는 안 된다는 거다.

그 말은, 영화를 다 찍고 난 뒤에 크레딧에서 연출자인 당신 이름을 빼겠다는 의미인가! 말이 안 되는 상황이다.

맞다. 결국 두 번째 편집 과정에서 채수응이라는 이름을 크레딧에서 빼기로 했다. 국가신문출판광천총국(기자 주: 중국의 미디어 관리 감독 기구다.)이 공식적으로 발표한 건 아니지만, 이미 중국 제작사끼리 한국인과 일하는 이들을 서로 신고하도록 하는 시스템이 구축된 상황이었다. 결국 연출에 조감독 이름을 대신 올렸고, 극장 개봉도 어렵게 됐으니 단관에서 쇼케이스만 한 뒤에 온라인으로 제작비를 회수하기로 했다.

마음고생이 엄청 심했겠다. 창작자에게는 이름이 전부다. 작품에서 이름이 지워진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거다. 게다가 고대하던 첫 장편 연출이었는데…

하… (고개를 끄덕이며) 정말 맞는 말이다. 그렇게 재편집만 8번 정도를 거쳤다. 영화 제목도 세 번은 바뀌었을 것이다. 그렇게 간신히 심의 통과를 했지만, 한 번 거절이 날 때마다 3개월가량의 시간이 지나게 되니 2년이 훅 가더라. 다행인 건 그 과정에서 사드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됐고 내 이름을 다시 크레딧에 올릴 수 있었다는 거다.

본의 아니게, 예상치도 못한 엄청난 경험을 했다.
서극 감독이 나를 위로한다고 하는 말이, 자기가 영화를 만들던 70년대에도 ‘홍콩 감독은 안된다’면서 중국 영화 크레딧에서 홍콩 영화인 이름을 다 뺐던 적이 있다고 하더라. 결국에는 다시 허용되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말이다.(웃음) 중국이라는 곳이 기회가 많은 곳이고, 중국에서 영화를 찍을 때 만난 스태프도 모두 좋은 사람들이었던 건 분명하지만 그들 체제의 불확실성이 너무나 힘들었다. 정부가 권고하지 않았는데도 자처해서 일을 벌이고 그 상황을 악용하는 사람도 있다.

이야기 자체에 간섭하는 경우는 없던가. 예컨대 영화는 초능력을 소재로 하지만 상해의 빈부격차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말미에는 중국 인민들을 모두 좀비로 만들어버리기도 하는데.(웃음)
상해는 화려한 마천루가 보이다가도 길 하나만 건너면 ‘여기는 앞으로 재개발될 구역입니다’라는 말이 쓰여 있는 완전히 낙후된 시설이 존재한다. 이쪽에는 굉장히 예쁜 스타벅스가 있고 저쪽에는 재래식 변기가 있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 장면을 많이 담아내고 싶었다. 빈부격차에 관한 표현에 관해서는 중국 스태프들도 굉장히 공감했다. 하지만 좀비가 나오는 대목에서는… 특히나 투자자가 난리를 치더라.(웃음) 하지만 나에게는 굉장히 중요한 장면이었다. 사람을 조종할 수 있는 권력(초능력)을 지니게 된 등장인물 ‘훼이’(주아휘)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약간은 비꼬고 싶기도 했다.

여러모로 아쉬움이 남는다고 하더라도, 영상 기술만큼은 흠잡기 어렵다는 생각이다. 초능력 신을 연출하기 위해 사용한 200컷 넘는 VFX, 헤드기어를 쓰고 보는 360도 VR 영상같은 인상을 주거나 드론 촬영 느낌이 드는 광대한 장면들, 마치 뮤직비디오처럼 가볍게 편집된 이미지 호흡 등 시각을 사로잡는 요소가 많다.

굳이 영화관을 가지 않아도 영화가 우리를 찾아오는 시대다. 유튜브처럼 영화보다 훨씬 순발력 있고 유머러스한 콘텐츠를 다루는 플랫폼이 사람들의 시간을 훨씬 많이 점유한다. (작가주의적) 창작도 중요하지만, 관객이 자기 시간을 조금이라도 할애하고 싶게 만드는 새롭고 충격적인 비주얼도 중요하다. 두 시간 동안 사람을 붙잡아 놓으려면 책 한 권을 다 읽었을 때, 오페라 한 편을 봤을 때 드는 성취감과 비슷한 만족감을 줘야 한다고 본다. 시장이 그렇게 변화하면서 CG와 VFX처럼 그동안 보지 못한 걸 내세우는 전문가가 많아졌다. 그로 인해 영화 역량에 관한 의미도 많이 바뀌었다고 본다.

국내에서는 영상 기술에 중점을 둔 작품에 대한 평가가 너무 박한 감도 있다. 예컨대 <신과 함께> 시리즈를 두고 뻔한 신파라고 하지만, 지금껏 그 정도 수준의 VFX 기술을 구현해서 상업적으로 흥행까지 시킨 국내 제작사가 있었던가 물으면, 그렇지 않다. 그 가치를 인정해줘야 한다고 본다.

덱스터 스튜디오에서 일하면서 나도 많은 영향을 받았다. 지금 시장에 나오는 영화가 다소 가볍게 보일 수도 있지만, 한편 많은 사람이 그런 영화를 편한 마음으로 찾아보지 않나. 영상을 뒷받침하는 기술의 발전 속도는 앞으로도 엄청나게 빨라질 거다. 코로나19 이후로 비대면이 주목받으면서 통신 기술과 접목된 영상 분야와 VR의 시대는 더욱 당겨질 거라고 본다.

앞으로의 프로젝트도 당연히 영상 기술과 연결이 돼 있을 듯싶은데.
‘트랜스 휴머니즘’에 관심이 많다. 사람과 기술이 만나는 접점에서 벌어지는 일들 말이다. 여기에 사람의 기억이 어우러지는 소재라면 더 좋을 것 같다. 최근 <서치>를 제작한 이고르 세이와 함께 단편 작업을 했다. 요절한 카자흐스탄 출신 피겨스케이팅 선수 데니스 텐이 직접 써서 남긴 시나리오를 연출했는데, 눈이 보이지 않는 남자와 귀가 들리지 않는 여자가 전화기로 소통하며 사랑을 키우는 귀엽고 재미있는 이야기였다. 마치 <서치>가 보여준 ‘스크린 라이프’의 새로운 포맷같았다. 지금 쓰고 있는 장편 시나리오 역시 비슷한 형식으로 역시 이고르 세이와 함께 준비하고 있다.

마지막 질문이다. 최근 소소하게 행복한 순간은.
(곰곰이 생각한 끝에) 정말 행복할 때는… 잘 자고 일어나서 전화기를 딱 들었을 때. 내가 자느라 미처 보지 못한 사람들의 메시지가 쌓여 있을 때. 술 먹자는 연락이 와 있으면 더 좋고.(웃음) 나 아직 안 죽었구나, 싶다.



*스크린 라이프: 스마트폰, 노트북 등 스크린 화면으로만 진행되는 영화 장르. 공포 영화 <언프렌디드: 친구삭제>나 존 조 주연의 스릴러 영화 <서치>가 여기에 해당한다.



사진_이종훈(스튜디오 레일라)

2020-05-29 | 글 박꽃 기자 (got.park@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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