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러 찾지 않아도 어디선가 나타나는, 고요한 능력자 <팡파레> 박종환

2020-07-10|박꽃 기자 구독하기

[무비스트=박꽃 기자]



일부러 찾아다니지 않아도 여느 화면엔가 나타나 관심을 끌어당긴다. 이름을 콕 짚어 말하지는 않아도 얼굴은 눈에 익다. 드라마 <타인은 지옥이다>(2019)에서 보여준 소름 끼치는 인격장애 연기는 능력치의 아주 일부다. 상업영화 <원라인>(2016)과 독립영화 <잉투기>(2013) <초미의 관심사>(2019)에서 공통적으로 보여준 ‘동네 모지리’같은 코믹한 연기, 여자의 적극적인 구애를 끝내 물리치는 ‘훈남’의 여유로운 자세를 보여준 <밤치기>(2017), 고등학생 딸에게 치명적인 가해를 입히는 젊은 계부의 불편한 얼굴을 드러낸 <영하의 바람>(2018)까지. 특별한 구애 없이, 때마다 맡은 역에 꼭 들어맞는 모습을 보여준 고요한 능력자, 배우 박종환이다. 살인사건에 연루된 흔들리는 청춘의 심리를 생활 연기로 표현한 장르 영화 <팡파레>(2020)를 계기 삼아 그간의 연기 여정을 추려보는 그의 말솜씨는 연기만큼이나 퍽 설득력 있다. 그 ‘고요한 능력’에 귀 기울여 본다.


최근 수년간 당신 출연작을 본의 아니게(?) 많이 봤다. <잉투기> <원라인> <밤치기> <영하의 바람> <초미의 관심사>에 드라마 <타인은 지옥이다>까지. 주연상을 받은 <양치기들>(2015)을 못 본 건 좀 아쉽지만, 부러 찾아다니지 않았는데도 꽤 괜찮다는 영화를 보러 갔을 때 당신이 등장하더라. 많은 사람이 이런 식으로 배우 박종환의 연기를 접했을 것 같다.
(그 작품을 다 봤다고 하니) 그동안 잘해온 것 같아 기쁘다. 내 연기 발자국을 함께 따라서 온 셈이다.

개봉을 앞둔 <팡파레>에서는 형 ‘강태’(남연우)와 함께 이태원 술집을 터는 동생 ‘희태’역을 연기했다. 술집 주인을 살해한 뒤 동네 건달 ‘쎈’(이승원)과 시체 처리 업자 ‘백구’(박세준)가 나타나고, 사건의 목격자가 늘어나는 상황에서 ‘희태’는 극심한 불안에 시달린다.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이 안타까워 보였다. 다들 어딘가 결핍된 모습이다. 그 중에도 ‘희태’는 가장 자기 자신을 모르는 캐릭터인 것 같았다. 본인이 원하는 것, 해야 할 것이 뭔지 몰라서 심경 변화가 많고 불안정하다. 판단을 내리는 상황에서도 주변 반응에 휩쓸리고 자신감이 없다. 나도 살면서 나 스스로 그런 모습일 때 가장 안타까웠던 것 같다. 상황이 심각해지면 불안정한 기운이 주변 사람에게 전달되기도 한다. 지켜보는 사람도 쉽지 않아지는 거다. 그런 면에서 ‘희태’에게 마음이 갔던 것 같다.

살인 사건이 벌어진 와중에서도 두려워하지 않는 ‘제이’(임화영)를 비롯한 모든 출연 인물이 장르적인 특색을 보여준다. 당신이 연기한 ‘희태’만이 ‘학자금’을 언급하는 등 땅에 발을 딛고 있는 현실적인 인물의 고민을 보여주는데.

첫 리딩 때, 다른 배우들은 이미 장르적인 캐릭터를 추구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때부터 고민이 시작됐던 것 같다. ‘희태’ 역도 어느 정도 (영화의) 장르적인 결에 맞춰서 (도드라지는) 연기를 보여줘야 하는 건가? 그런데 (대사를) 내뱉을 때마다 현실적인 느낌에서 벗어나기가 참 어렵더라. 내가 현실적인 톤에 함몰돼서 그 이상의 것을 선택하지 못하는 건가? 뭔가를 잘못 파악하고 있나? 생각이 많았다.

‘제이’, ‘쎈’, ‘덕구’는 장르 영화에 기름칠을 해줄 분명한 성격을 드러내는 인물이다. 등장만으로도 이야기를 진척시키는 기능을 수행한다. 반면 ‘희태’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정된 공간에 머물면서 변화하는 감정을 보여줘야 하는 유일한 인물이다.

지금 말한 그 부분이 가장 숙제였다. (한정된 공간에 머물다 보니) 이야기가 잘 진행되고 있는지, (내 감정이)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지, 그 감정이 조금씩이라도 다르게 전달이 되고 있는지 고민이 많았다. 뭔가 제자리에서 맴도는 것 같았다. 본래 같은 장면을 열 번 찍는다고 해도 감정을 더 크게 (증폭해서) 보여주지는 못하는 편인데, <팡파레> 때는 혹시라도 정체된 인물처럼 보일까봐 (매번) 새로운 감정을 보여주려고 시도했다.

형 ‘강태’와 관련된 특정 사건을 기점으로 ‘희태’의 감정은 폭발한다. 눈물을 흘리며 감정을 토해내는 신이 나오는데.
그 장면도 쉽지 않더라. 상대를 책망하면서 슬퍼해야 된다는 게.(웃음) 그래 본 적이 없어서 낯설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나는 책망은 책망대로 하고, 슬픔은 슬픔대로 느끼는 편이다. 그걸 동시에 연기하려니까 마치 미션 같았다. 그런 느낌이 들 때는 생각을 더 다양하게 해봐야 하는데 오히려 더 그러기가 어렵다. 좀 더 유연했다면 어땠을까 싶다.

이 모든 고민을 이돈구 감독과 어느 정도 공유했는가. 대개 배우들은 당신이 말한 그런 느낌이 들 때 “감독과 대화를 많이 했다”고 표현하던데.
대화를 많이 나누지는 못했다. 촬영 자체가 10회 차였고 쉬는 날이 없기도 했다. 저녁부터 촬영을 시작해 다음 날 해 뜨기 전까지 일하고 퇴근했다. 그리고 그날 해 질 무렵에 다시 나왔다. 그러는 동안에도 끝까지 (고민) 해결이 잘 안 됐다. 결국에는 콘티와 대본에 의지했던 것 같다. 3~4회차쯤 찍었을 때, 아침 첫차를 타고 (집으로) 이동하면서 콘티와 대본을 계속 보는데 한참 가는 도중에 누가 나를 부르더라. 감독님이 같은 칸에 탔던 거다. 아마 나를 한참 쳐다보고 있었던 것 같다. 감독님은 첫 리딩 때 ‘희태’를 연기하는 내 톤을 보고 나서 딱히 다른 얘기는 없었는데, 내가 계속해서 고민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생각한 것 같다.

지난달 24일 <팡파레> 기자간담회에서 이돈구 감독과 ‘같은 동네 사람’이라고 했다. 차를 마시고 진솔한 대화를 나누면서 긍정적인 교감이 이루어진 것 같았다.

다양성 영화에 출연하면 영화제, 영화상 같은 (행사) 자리에 다니게 된다. 그 과정에서 여러 사람을 만났는데 이돈구 감독도 그중 하나다. 내가 출연한 <양치기들>을 봤고, 나를 잘 알고 있다고 하더라. 사적인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사는 곳이 너무 가깝다는 걸 알게 됐다. 종종 동네에서 차 한잔 마시자고 인사말처럼 건네고 헤어졌는데, 얼마 안 있어서 정말 연락이 왔다.

그때 <팡파레> 출연을 제안받은 건가.

처음부터 그런 건 아니었다. <현기증>(2014) 이후 오랫동안 영화를 준비하게 되면서, 고민이 많았던 것 같다. 그의 얘기를 듣다 보니 감독이 영화 한 편을 만들기 위해서는 정말 녹록지 않은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걸 알겠더라.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 사람을 만나고, 그들에게서 본인이 느꼈던 감정이 (어떤 이유로) 전복되기도 하면서 많은 걸 느낀 것 같았다. 어느 날 다시 만났을 때 <팡파레>를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는데 굉장히 심사숙고해서 만들고 싶어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작품을 만들어야만 그가 다음 행보를 이어갈 수 있겠더라. 마음에 와닿아 힘이 돼 주고 싶었다. 동네 주민으로서 같이 차를 마시는 감독이다 보니 애정이 생기더라.(웃음)

그런데 정작 ‘희태’를 연기하는 동안 생긴 고민을 감독에게 죄다 털어놓은 것 같지는 않다. 본래 성향인가.
<양치기들>까지는 굉장히 맹렬했다. 그렇게 표현하는 데서 영화 하는 의미를 찾을 정도였다. 그런데 맹렬하게 굴 때의 부작용은, 주변 사람들이 불안해한다는 것이다.(웃음) 그래서 그 뒤부터 <팡파레> 때까지는 (일부러) 그렇게 하지 않았다. GV때 감독과 어떤 이야기를 나눴냐는 질문이 나오면 할 말이 없어서 그냥 각자 자리에서 할 일을 열심히 했다고 말할 정도로.(웃음) 그러던 게 최근에는 다시 조금 바뀐 것 같다. (과거처럼) 맹렬한 정도는 아니지만, 연출자가 나에게 다가오려는 걸 차단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초미의 관심사>부터는 남연우 감독에게 내 의견을 제시했고, 내 느낌을 가감 없이 전달했다. 그때부터는 내가 원하던 대답이 돌아오지 않아도 별 상관이 없더라. 예전에는 그런 게 중요했는데, 지금은 상대를 존중하면서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는 소통하는 방식을 고민하고 있다.

정가영 감독의 <밤치기>에서는 어땠나. 상대의 일방적인 구애를 기어코 거절하는 훈남 ’진혁’역을 연기했다. 내 경우에는 그때 처음으로(?) 당신의 ‘잘생김’을 발견했다.(웃음) <잉투기>의 ‘교미킹’, <원라인>의 ‘기태’는 어딘지 좀 모자란 듯한 느낌의 웃음을 주는 캐릭터였기 때문에 더더욱 <밤치기>의 얼굴이 새로웠던 것 같다.
그 영화도 (<팡파레>만큼) 정신없이 촬영했다. 그때의 미션이 있었다면, 상대와 본격적인 대화를 나누는 두 신의 시간이 25분, 35분 정도로 길다는 거였다. 정가영 감독은 내가 대사를 다 숙지해주길 바랐고, (가능하면) 끊지 않고 한 번에 촬영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틀리면 틀린 데서부터 다시 이어서 하면 된다고 부담은 갖지 말라고 했지만, 그렇게 길게 연기해본 적이 없어서 이걸 내가 할 수 있을까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극 중 전개처럼) 실제로 술을 홀짝홀짝 마시면서 촬영을 했더니 30분 정도 지나니까 취기까지 생기더라.(웃음) (다행히) 틀리지 않고 그대로 흘러갔다. 그 정도 긴 지문을 숙지하는 게 가능하긴 하더라.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어떤 작품에 출연한다는 건, 내가 뭘 할 수 있고 할 수 없는지를 확인해보는 과정이기도 하겠다.

그런데, 나는 그렇게 해내도 그게 ‘내 것’같지가 않다. 만약 그 연기를 다시 해보라고 하면, 그때 한 번 해봤으니까 수월하겠지?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 거다. 촬영을 다 끝내고 나서 재촬영을 해야 하거나 (따로) 녹음을 해야 할 때 나만큼 곤란해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웃음) 그만큼 (한 번 했던 연기를 다시 하는걸) 잘 못 한다. 드라마 <타인은 지옥이다>에서 연기한 캐릭터는 사람들이 인상적으로 느끼는 자극적인 표정이나 대사가 있지 않나. 그게 재미있어서 내 주변 친구들이 잘 따라 하곤 하는데, 그중에서 가장 잘 따라하는 친구랑 대결을 했다가 내가 졌다. 내가 오리지널인데…(웃음).

(웃음) 한편으로 고등학생 딸에게 부적절한 행동을 하는 계부 ‘영진’역을 연기한 <영하의 바람>에서처럼, 상당히 불편한 느낌을 주는 인물도 보여줬다. 다양한 얼굴을 잘 소화해낸다는 생각이다.

감독님들이 날 불러주고, 믿어주고, 다양한 역할을 준다는 게 고맙다. 거기에 보답하고 싶었다. 그렇다고 내 연기에 만족해본 적은 없다. 안도까지는 해봤다. 민폐는 아니었구나.(웃음) 하면서. 이렇게까지 생각할 필요도 없고, 더 자신 있어야 한다고 생각은 하는데…

배우는 계속해서 선택받는 입장에 놓여있어 힘들다고도 하는데, 당신도 그런 괴로움에서 자유롭지 못한 순간이 있나.
그렇지는 않다. 내가 어떤 감독님과 친분이 있다고 해도 그 작품에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으면 그 작품은 선택하지 않는다. 반대로 미팅을 한 감독님이 (나를) 꽤 인상적으로 좋게 봤음에도 (이번 작품에서) 당신을 부르지 않는 걸 너무 서운해하지 말라고 전해온 경우도 있다. 그게 더 낫다고 생각해서 그런 거니 잘 지내고 (다음 기회로) 또 보자는 거다. 그러다 보니 ‘선택을 받는다’는 것에 대해서 (선택을 받으면 기쁘고, 그러지 못하면 힘들다는 류로) 단순하게 반응하지는 않는 것 같다.

(끄덕끄덕)
언젠가 어떤 외국 배우의 인터뷰를 봤다. 감독님들의 선택을 받지 못하고 오랫동안 강제로 휴식을 취했는데, 그 시간이 너무 힘들고 고립감도 컸다고 한다. 주변 선배와 동료들에게 그런 마음을 이야기했더니 누군가가 말했다고 한다. 그 시간이 오히려 너를 독으로부터 지켜주는 때일 수도 있다고. 그 말이 와닿았다.

그래도 이렇게 꾸준히 좋은 배역이 들어온다는 건, 배우로서 정말 큰 기쁨 아닌가.

(미소를 지으며) 일 이상의 어떤 기쁨이 있는 것 같다.

연기로서 늘 무언가를 표출해내는 입장이라면, 내면의 양식을 채워 넣을 땐 어떤 방법을 쓰나. 좋은 ‘인풋’이 있어야 그만한 ‘아웃풋’도 있다고 생각하는데.

근래에 가깝게 지내는 사람들은 전부 영화를 하는 사람들이다. 그렇게 모이면 대부분 영화 이야기를 하게 된다. 그러면 (내면의) 곳간이 채워지질 않더라. 그렇다고 새로운 사람을 찾는 것도 쉽지 않고, 미친 척하고 모르는 사람에게 말을 걸 수도 없고.(웃음) 결국 가까운 사람들과 영화 아닌 다른 즐거운 이야깃거리를 찾으며 희로애락을 느껴보려고 하는 편이다. 어떻게든 곳간을 채워야 하니까. 단체로 근교의 자연에 모여서 체육대회 같은 것도 열어보려고 했다. 계속해서 잘 이루어지지 않다가 어느덧 (뜻 맞는) 사람들이 많이 모였고 체육대회를 열게 됐는데, 정작 내가 시간이 안 돼서 참석을 못 했다.(웃음)

전혀 다른 직업이나 경험을 가진 사람들끼리 교류하면 고립감이나 외로움이 약화한다는 접근도 있더라.
2018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시네마투게더’라는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영화인 한 명이 2박 3일 동안 (일반 관객과) 팀을 짜서 영화 5~6편을 같이 관람하는 거다. 처음에는 모르는 사람하고 만나서 영화를 같이 보고 얘기를 나누는 게 가능할까 싶었는데, 직접 해보니 생각보다 새로운 에너지를 많이 받게 되더라. 영화 종사자가 아니라 정말 다양한 일을 하는 분들이 모였다. 결국 우리 팀은 영화 얘기는 안 하고 다른 말만 많이 했다.(웃음) 그게 참 재미있었고, 자극도 많이 됐다. 그 뒤로도 한동안 잘 지낼 수 있는 힘이 된 것 같다.

또 한 번 그런 시간을 갖게 되길.(웃음) 앞으로의 작품 계획은.
9~10월쯤 독립영화 촬영에 들어간다. 어렸을 때부터 헤어져 지낸 딸이 대학에 들어갈 나이가 됐을 때, (그제야) 같이 지내보려는 아빠 역할을 맡았다. 딸과 동행할 수 있는 걸 찾아보려고 하는 입장이다.

재미있겠다. 그런데, 어렵겠다!
어려운 건, 그렇게 불편하지 않다.(웃음)

마지막 질문이다. 최근 소소하게 행복한 순간은.
(한참을 고민하다가) 너무 많아서… 최근에는, 어머니와의 관계. 그게 요즘의 나에게 좋은 영향을 주는 것 같다.



사진_이종훈(스튜디오 레일라)

2020-07-10 | 글 박꽃 기자 (got.park@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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