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게 말이 돼?” 몰랐던 것 알 준비 됐나요 <69세> 임선애 감독

2020-08-25|박꽃 기자 구독하기

[무비스트=박꽃 기자]

오십견으로 고생하는 69세 노인 여성 ‘효정’은 물리치료를 받으러 간 병원에서 29살 젊은 남성 간호조무사 ‘중호’에게 성폭행당한다. 임선애 감독의 영화 <69세>가 다루는 이야기에 일부는 놀라 펄쩍 뛰었다. 영화평을 남길 수 있는 대형 포털의 공간에 “젊은 남자가 미쳤다고…” 같은 류의 날 선 비난이 잇달았다. 현실에서는 좀처럼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일을 과장해 드러내는 것이 몹시 불편하다는 목소리다. 누구든 잠시간 의구심을 품게 될 만큼 충격적인 소재임을, 인정하지 않기란 어렵다. 하지만 ‘노인 성폭행’이라는 다섯 글자를 인터넷 창에 검색했을 때 노인 여성을 대상으로 벌인 젊은 남성의 ‘미친’ 짓이 얼마만큼 기사화됐는지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잠시 말을 잃게 된다. 신고율이 낮은 노인 성폭력 범죄 특성상 기사화되지 않은 사건은 더 많을 것이다. <69세>가 다루는 세계가 말이 되느냐, 고 다그치기보다는 그런 세계가 도래한 지 이미 오래되었다, 고 받아들이는 쪽이 더 옳을 것이다. 이 세계를 보다 먼저 알게 된 임선애 감독은 자신의 작품을 걸고 관객에게 질문한다. 당신이 미처 알지 못한 삶에 대해 눈을 뜰 마음의 준비가 되었느냐고.


데뷔작 <69세>로 젊은 남자 간호조무사에게 성폭행당한 69세 여인 ‘효정’의 이야기를 다뤘다. 가장 먼저, 주인공 ‘효정’ 역을 맡아 열연한 예수정 배우에 대해 이야기해야 하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실제 60대인 배우 중에서 이 역할을 할 수 있는 분이 그리 많지는 않았다. 상업 영화에서 어머니, 할머니 이미지로 많이 소비된 경우 내게 신선한 느낌을 주지 못했던 것 같다. 반면 예수정 선생님은 영화, 드라마, 연극에서의 이미지가 굉장히 다양하더라. 시나리오를 쓸 때부터 주인공 이름을 ‘수정’과 비슷한 ‘효정’으로 ‘비스무리’하게 지었다. 캐스팅 단계에서 어려움을 겪는 감독도 많은데 운이 좋았던 것 같다. 시나리오를 전달한 뒤 바로 전화가 왔으니까. 물론, 그때는 전화가 오면 바로 작품에 출연하는 건 줄 알았다!(웃음)

당시 오간 이야기가 궁금한데.

예수정 선생님 의사는 반반이었다. 이런 시나리오가 드물고 그래서 반갑기는 한데, 당신이 생각하기에 조금은 수정됐으면 하는 부분이 있고 감독이 그 점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참여하고 싶다고 하셨다. 예컨대 “내가 60대잖아, 우리는 이런 말 안 써” 하면서 닭살이 돋는 대사를 좀 고쳐준다든지.(웃음) 또 이야기의 마지막 부분에서 ‘효정’과 ‘동인’이 같은 반지를 끼고 있는 걸 자연스럽게 보여주려고 했는데, 영화나 드라마에서 노년 부부가 해로하는 장면을 넣는 건 그저 젊은이들의 판타지일 수도 있다고도 하셨다.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을 깨우쳐줬고 그래서 더더욱 그와 작업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위 ‘고양이 눈’을 하고 매달렸다.

예수정 배우와 함께 영향을 주고받으며 작품의 섬세한 결을 완성한 셈이다.

(끄덕끄덕) ‘효정’이 횡단보도에서 사고 날 뻔한 장면에서는 운전자가 좀 더 세게 말해줬으면 좋겠다고도 했다. 그래서 ‘효정’의 심정을 더 밑바닥까지 끌어내렸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나도 심하게 쓴다고 쓴 대사인데… 마치 <위플래쉬>에서 제자에게 채찍질하는 스승처럼 더! 더! 더! 할 수 있다면서 계속해서 용기를 주셨다. 그래서 ‘관뚜껑’, ‘관짝’ 같은 말까지 생각났다.(웃음) ‘효정’의 마지막 내레이션도 카카오톡으로 계속 의견을 주고받았다. 간병인을 하면서 지금까지 살아온 69세 ‘효정’이라면 ‘간호조무사’라는 정확한 명칭보다는 ‘병원 조무사’ 정도의 표현을 쓰지 않겠냐는 의견도 주셨는데, 작품 전체를 바라보는 눈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제안이었다고 생각한다. 영화의 주제와 목표에 기준을 두고 하는 이야기였던 만큼 예수정 선생님의 의견에 대부분 공감하면서 촬영했다.

배우의 도움을 받는 한편, 여러 내용을 취재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직 살아보지 않은 노인 여성의 삶은 물론이고 그가 겪는 치욕적인 일과 그 이후의 대응에 대해서 말이다.
꼭 ‘취재’를 한 건 아니다. 주변 친구들과 이야기해보면, 대부분 비슷한 경험이 있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처럼 성희롱, 성추행당한 경험을 털어놓는데 가해자가 친척이나 선생님처럼 아주 가까운 사람이었다는 점은 정말 놀랍다. 성인이 돼서 사회생활을 할 때도 마찬가지다. 어떤 농담이 위태로운 경계선을 넘나드는 경우가 있는데, 분위기를 깨지 않으면서도 상황을 맞받아치는 연습을 해야 하고 그걸 잘하지 못하면 나만 불편한 사람이 되는 이상한 경험이 축적된다. 만약 이런 경험이 특정한 시절을 거쳐 끝나는 게 아니고, 누구에게나 비슷하게 계속해서 일어나는 것이라면 69세가 돼서도 당연히 비슷한 상황이 생기지 않을까? 그렇게 보니 ‘효정’은 나라는 사람의 경험으로도 충분히 가늠할 수 있는 인물이더라.

듣고 보니, 그럴 수 있겠다.

영화를 시작할 때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 중 하나는 노인과 여성을 분리해서 보는 사회적 편견이다. 예컨대 영화의 첫 장면에서 간호조무사 ‘중호’가 불편한 말을 할 때, ‘효정’은 굉장히 의연하게 밀어낸다. 이게 성희롱인지 아닌지… 처음에는 애매한 느낌이 드는데 어느 순간 확실한 불안을 감지하게 되기 때문이다. 물리치료실이라는 단절된 공간에 공포가 스며들수록 ‘효정’은 아무렇지 않은 척 상대와 거리를 두려 하지만 속으로는 엄청난 불안함과 두려움이 밀려온다. 여성이라면 살아오면서 많이 느껴봤을 법한 상황이다.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는 검은 화면에서 ‘효정’과 간호조무사 ‘중호’의 음성만 나오는데, 상황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더라.

처음부터 그 장면은 그렇게 만들려고 했다. ‘효정’의 고립감을 보여주고 싶기도 했고, 화면을 보여줌으로 인해서 노출될 서로의 신분이나 옷차림 같은 것들이 상황을 재단하는 또다른 근거가 되는 걸 최대한 차단하려고 했다. 영화의 객관성과 긴장감을 위해서 작은 정보만 던지고 관객에게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

관객이 심정적으로 동요하는 순간도 생긴다. ‘효정’이 치매라는 정보를 알게 되면서다. 혹시, 피해사실 자체가 그의 착각인 건가? 의심이 생긴다.
‘동인’(기주봉)이 바로 그런 관객의 심정과 동일 선상에 있는 인물이다. 이상한 게 아니고, 당연히 그럴 수 있다. 성폭력 피해자라고 하더라도 한 사람에게는 다층적인 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효정’에게는 하필 그 부분 중 하나가 치매다. 이 상황에서는 약점으로 작용하는 면이다. 하지만 설령 어떤 순간 ‘효정’의 기억에 혼돈이 있었을지라도 가해를 당한 순간의 기분은 정확하게 기억할 것이다. ‘효정’은 그 순간이 너무나도 고통스러웠기 때문에 (여러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려 한다.

기억의 혼란은 굉장히 동의하는 지점이다. 내 기억을 확신하고 상대와 대거리를 하다가 사실은 내 기억이 틀렸다는 걸 알게 되는 낯뜨거운 경험이 누구든 몇 번쯤 있으리라고 본다.
언젠가 아빠와 산에 함께 간 적이 있다. 난 그곳을 청계산이라고 기억하고 있는데, 아빠는 자꾸만 아니라고 하시는 거다. 언젠가 아빠가 받은 건강검진에서 치매의 확률이 조금 있다는 결과가 나온 걸 아는 나는 내 기억이 확실하다고 믿었다. 그런데 1년쯤 지나고 나서 우연히 당시의 사진을 보니, 청계산이 아니라 남한산성이더라.(웃음) 곧바로 죄송하다고 사과드렸다.


완벽하지 않은 ‘효정’을 묘사하는 영화의 태도가 그래서 더 현실적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아마 다 ‘효정’이 치매가 아니고, 관련된 당시 상황을 정확히 기억했다고 하더라도 어려움은 있었을 것이다. 영화 속 상담센터에서 나오는 대사처럼, 사건 현장에 CCTV가 있었어도 ‘효정’은 “당했다”는 사실을 증명했어야 할 거라고 하지 않나. 극 중 영장이 기각될 때 ‘개연성’을 운운하는 것도 실제 상황에서 차용한 말이다. 만약 피해자가 젊은 여자였다면 나올 수 있는 말들일까. 피해자가 노인 여성이라는 것 자체가 약점으로 작용한다. 안타까운 현실이다.

가해자 ‘중호’는 그런 현실에서 암약한다. 가해자 캐릭터를 그릴 때 염두에 뒀던 지점이 있다면.
시나리오 초고를 본 주변인들이 ‘중호’를 간호조무사가 아닌 의사로 하면 어떻겠냐고 하더라. (의사와 환자 사이의) 갑을관계를 보여주면 관객이 더 공분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이다. 하지만 나는 그것만큼은 지양했다. 가해자를 무조건적인 악이나 거대한 권력으로 그리고 싶지는 않았다. 오히려 병원 내부에서는 간호조무사라는 그리 우월하지 않은 신분인 ‘중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인 여성을 만났을 때 힘으로 상대를 제압할 수 있다는 면을 보여주려고 했다.

너무 충격적인 이야기라 그런지, 영화의 내용을 잘 받아들이지 못하는 인터넷상의 일부 의견도 있는데.
일부 댓글을 보니 “29세 남성이 미쳤다고…” 라든지 “이게 말이 되냐”는식의 내용이 있더라.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도 노인을 대상으로 성폭력을 저지른 젊은 남성의 사례가 여러 차례 기사화됐다. 중국에서는 40대 남자가 할머니들만 골라 성폭력을 저질러 공분을 산 일도 있다. 이런 범죄는 신고율이 낮고 가해자의 신분도 잘 노출되지 않는다는 걸 알아서 재발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누군가에게는 생경한 사건으로 받아들여질지 모르지만 이런 일은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 판타지가 아니라 현실이다. 이 영화가 성폭력의 사각지대에 있는 이야기를 다루는 시작점이 되길 바란다.

많은 관객이 당신의 뜻을 알아줄 거로 생각한다. 마지막 질문이다. 최근 소소하게 행복한 순간이 있다면.
영화를 만들 때부터 개봉할 때까지 도와주신 분들이 많다. 요즘 홍보팀과 배급사는 (자신들도 힘들 텐데) 오히려 내 마음을 신경 써준다. 촬영단계부터 개봉까지 이 영화를 위해 일해주는 분들이 하나같이 영화를 응원해주는 그 마음을 느낄 때, 그때가 가장 행복하다.

사진_이종훈(스튜디오 레일라)

2020-08-25 | 글 박꽃 기자 (got.park@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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