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민한 이야기 다루는 반골 기질 <메이드 인 루프탑> 염문경 작가

2021-06-29|박꽃 기자 구독하기

[무비스트=박꽃 기자]



염문경은 김조광수 감독 신작 <메이드 인 루프탑> 시나리오를 쓴 작가이고, 동시에 단편 영화 <백야>를 연출한 감독이기도 하다. 신인 영화인이겠거니, 싶은 이력을 넘어 그를 좀 더 확실하게 설명하고 싶다면 ‘펭수’가 출연한 유튜브 채널 <자이언트 펭TV>의 작가라는 것도 빼놓을 수 없다. 영상 콘텐츠 좀 즐긴다는 사람이라면 대번에 ‘아!’ 소리가 날 만한 흔치 않은 경력을 지닌 염문경은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한 뒤 연극배우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상업 영화 <안시성>(2018) <악질경찰>(2019) 등에서 조단역으로 출연했고, 단막극을 연출하던 절친한 연극 선배의 권유로 MBC 단막극 <퐁당퐁당 러브>(2015)의 보조 작가 생활도 경험한다.

배우로, 작가로, 감독으로 역할을 확장하며 자기 안의 메시지를 표현할 다방면의 수단을 확보해온 염문경은 지금 어떤 새로운 이야기를 마음에 품고 있을까. 90년대생 성 소수자의 삶과 사랑을 다룬 <메이드 인 루프탑> 시나리오를 쓰게 된 과정, 연극계 미투를 소재로 한 단편 영화 <백야>를 연출한 이유, 성범죄를 추적하는 두 여성의 이야기를 다루게 될 차기작 상업영화 계획까지, 염문경은 “누군가에게는 예민할 수도 있는 이야기를 다루는 반골 기질”임을 자처한다. 동시에 상처받고 차별당하는 이들의 경험을 이해하게 하는 작품을 만들고 싶다고 말한다.



김조광수 감독의 두 번째 장편 영화 <메이드 인 루프탑> 각본을 썼다. 그와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됐나.
<와니와 준하>(2001)를 연출한 김용균 감독님을 한국콘텐츠진흥원 창의인재동반사업 시나리오 멘토로 만났다. 프로그램 종료 후 작가 자격으로 작업자를 소개해주신다기에 나간 자리에서 김조광수 감독님을 알게 됐다.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 기간과 분량은 어느 정도인지, 여러 이야기를 듣다 보니 내가 쓸 수 있을 것 같더라. 될 일은 빠르게 된다고 바로 성사됐다.

김조광수 감독은 정체성 고민을 이미 다 끝내버린 ‘90년대생 게이들’의 밝고 명랑한 청춘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고 했다. 시나리오 집필 과정에 그의 의견이 어느 정도로 반영됐나.
90년대생 게이 커뮤니티로부터 자기들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고 하셨다. 이야기의 큰 뼈대가 될 만한 소재를 전해 주셨다. ‘하늘’(이홍내)과 ‘봉식’(정휘)이 지닌 각자의 큰 사연이 있지 않나. 그 둘의 이야기를 한 영화 안에서 풀어보고 싶다고 말씀하셨고, 캐릭터와 톤앤매너 정도만 논의한 뒤 내가 많은 걸 (자유롭게) 펼칠 수 있도록 맡겨 주셨다.

이야기 구성과 전개에서 중요하게 고려한 부분은.
두 인물이 주인공인 로맨틱 코미디물에서는 보통 그 둘이 사귀어야 할 텐데…(웃음) <메이드 인 루프탑>은 각자의 이야기를 하는 병렬적 구조다. 그 부분이 좀 느슨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서로의 에피소드를 교차하려고 했다. 상황 안에서 그 인물이 어떻게 반응할 것인지, 어떤 대사를 사용할 건지 결정했다. 고양이를 잃어버린다는 설정은 감독님이 미리 말해주신 부분이고, 나도 같은 경험이 있어서 잘 쓸 수 있었다.


집필 작업이 대개 그렇듯, 수정된 부분도 있을 것 같은데.
여러모로 경제적인 플랜(웃음)의 프로젝트여서 계약 기간이 (짧게) 정해져 있었고, 수정할 시간도 많지 않았다. 다만 처음에는 ‘순자’(이정은) 캐릭터가 없었다. 조금은 판타지같고 가짜처럼 보일 수도 있는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감독님이 이태원에 사실 때 ‘순자’같은 집주인을 실제로 만났다고 하시길래 그렇다면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사람이 실존했다는 것 자체도 좋은 이야기인 데다가, 장르성에 기대어 주인공들에게 안전한 공간을 마련해 준다는 의미에서도 괜찮을 것 같았다.

시나리오를 쓴 동시에 ‘하늘’ 남자친구의 여동생 역으로도 출연했다. 조심스러운 얘기지만(웃음) 시나리오를 쓸 때부터 직접 연기하는 안을 고려했던 건가.
마음 한편에서는, 내가 맡을 수 있는 배역이 있다면 연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글을 쓰는 단계에서는 그런 생각은 묻어두려고 한다. 그런 마음을 품고 글을 쓰는 건 윤리적으로 옳지 않을뿐더러(웃음) 그 마음을 알게 되는 상대(감독) 역시 당황할 수 있지 않겠나.

작가로서 지키고 싶은 직업윤리가 있겠지만 동시에 배우 출신이니 좋은 배역에 욕심나는 것도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본다. 연극 출연으로 배우 생활을 시작했다.
연극영화과가 아닌 신방과를 졸업하고 나니 연기 쪽에 아는 사람이 없더라. 주로 인터넷에 올라와 있는 공고 위주로 지원하면서 학생이 연출하는 단편영화와 연극에 접근하게 됐다. 당시의 나로서는 그쪽 접근성이 좀 더 높았던 것 같다. 학생 단편영화는 출연을 해도 완성이 됐는지 아닌지 알 수 없는 경우가 많아 흔적이 잘 남지 않았는데, 연극에서는 동료가 많이 생겼다.


자연스럽게 규모 있는 영화의 조단역으로 출연하게 된 건가보다. <미씽: 사라진 여자> <박열>(2017) 등 여러 작품에 출연자로 이름을 올렸다.
<미씽: 사라진여자>는 내가 제일 처음 출연한 상업 영화다. 그런데 현장에 가니 내가 출연하기로 한 장면 자체가 없어졌더라.(웃음) 너무 미안하다며 다른 장면에 나오게 해 주셨는데 그마저도 편집 당했다. 영화계에는 그런 일이 많다고 들었다. 실망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지만, 처음 경험한 현장이 여성 감독이 연출하고 두 명의 여성 배우가 주연한 곳이었다는 것만으로도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 외에도 <안시성> <악질경찰> <도어락>(2018)… 이렇게 다양한 작품에 출연했나.(웃음)
아마 내 얼굴을 찾을 수 없을 거다!(웃음) 사실 <악질경찰>에는 두 번이나 나왔다. ‘권태주’(박해준)의 악마성을 보여주기 위한 신이었는데, 새하얀 반도체 건물 안에서 그가 마스크 쓴 나를 협박하는 장면이었다. 얼굴이 안 나와서 아무도 모를 테니 ‘기자’역을 한 번 더 해도 될 거라고 해서 1인 2역을 하게 됐다.(웃음)

정작 당신의 이름을 가장 유명하게 한 건 ‘펭수’가 출연한 유튜브 채널 <자이언트 펭TV> 작가로서다. 배우 활동을 하다가 작가 일은 어떻게 시작하게 된 건가.
연극배우 시절 친했던 선배가 김슬기, 윤두준 주연의 <퐁당퐁당 러브>라는 MBC 단막극을 연출했는데 그때 후배인 나에게 보조 작가 일을 제안했다. 그때만 해도 아르바이트 개념으로 언니에게 일을 배우겠다는 생각이 컸다. 연극계에 연출과 극본을 동시에 맡는 사람이 많지 않았으니까. 처음 보조 작가로 참여한 작업이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행운을 누렸고, 그의 다음 단막극에서도 보조작가를 했다. 그러면서 (<자이언트 펭TV>의) 이슬예나 PD를 소개받게 됐다. EBS에서 어린이, 청소년을 위한 어린이날 단막극을 연출하는데 내부에 드라마 작가가 많지 않아 사람을 찾고 있었다.


정말 귀한 인연의 시작이다.(웃음) 사람 복이 많다고 할 수밖에 없겠다.
작가로서는 특히나 운이 좋은 케이스다. 여복이 많다.(웃음) 이슬예나 PD와 죽이 너무 잘 맞았고, 초등학생을 타깃으로 한 웹드라마 역시 반응이 좋았다. 이슬예나 PD가 ‘펭수’의 세계관을 같이 기획해보자고 했을 때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예능 일을 오케이한 건, 그게 기쁜 순간을 함께 경험해왔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가 아니라면 아마 수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자이언트펭 TV>는 엄청나게 잘 나가는 모바일 콘텐츠 프로그램이 되지 않았나.(웃음) 그런데 작가로 일하는 도중에 영화 시나리오까지 쓰기 시작한 모양이다.
처음에는 생계처럼 시작한 작가 일이지만, 어느 순간부터 아르바이트라는 이름의 변명을 대기보다는 책임감과 전문성을 지니고 일하는 사람이 되고 싶더라. <와니와 준하>의 김용균 감독님을 만난 바로 그 멘토링 프로그램에 지원하면서 <메이드인 루프탑>까지 일이 이어진 거다.

최근에는 연출까지 직접 했다. 연극계 미투를 소재로 한 단편영화 <백야>를 만드는 과정에서 서울국제여성영화제로부터 제작지원을 받기도 했다.
필름X젠더 부문의 제작금을 지원받았다. 내게 너무나 큰 의미로 다가왔다. 이 이야기가 바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이야기라는 증명인 것 같아서 말이다. 안도감이 생겼다.


첫 연출작으로 연극계 미투를 소재로 한 계기가 있을 것 같은데.
올해 낸 책 <내향형 인간의 농담>에서 밝혔기 때문에 드릴 수 있는 이야기다. 인터넷으로 지원한 프로젝트에서 만난 캐스팅 디렉터를 성추행으로 고소하려 했던 일이 있었다. 그 상황을 증언할 수 있는 또 다른 여성 배우도 있었다. 그런데 (가해자가) 사망하면서 고소를 할 수 없게 된 상황이 닥쳤다.

미리 <백야>를 본 입장에서 당시 당신의 경험과 감정이 영화에 잘 담겼다는 생각이 든다.
아마 단순히 그 경험뿐이었다면, 나에게도 좋은 기억이 아니니 그냥 회피했을 것 같다. 그런데 당시는 연희단 거리패에서 벌어진 ‘이윤택 사건’ 때문에 배우들 사이에 집단적인 트라우마 같은 게 존재했던 시기였다. 연희단 거리패는 아무 기반도 없는 전국의 연기자 지망생이 워크숍 형태로 지원하고 활동할 수 있는 집단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그 내부는 좀 컬트적이라고 할 정도로 폐쇄적인 특성이 느껴지는 곳이었다. 그 안에서 일어난 일이 마치 도시 괴담처럼 떠돌아다녔지만 다들 ‘그 사람 정말 왜 그래?’하고 마는 정도였을 뿐이라, ‘미투’로 일이 커지고 나서는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던) 배우들이 모두 비슷한 종류의 죄책감과 우울감을 느끼고 있었다.

비슷한 경험이 당신을 적극적으로 움직이게 했나 보다.
어떻게든 그 상황을 헤쳐나가야 하는 시점이었다. 내 개인적인 경험과 연희단 거리패 사건이 합쳐지면서 <백야>라는 이야기를 연출하겠다는 마음이 생긴 것 같다. 독립영화, 단편영화지만 성폭력 피해자의 상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은 현실에서 한 번쯤 그려볼 만한 이야기인 것 같았다.


<내향형 인간의 농담> 출간 이후 한 인터뷰를 살펴보면 ‘아무도 불편하게 만들지 않는 유머’와 그런 종류의 태도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런데 작품 안에서는 사회적으로 민감하게 여겨지는 지점이 있는 주제를 정면으로 다뤘다. <메이드 인 루프탑>은 성 소수자를, <백야>는 연극계 성폭력을 이야기한다.
그건 나에게도 큰 화두인 질문이다. 내가 선택하는 소재들은 분명 누군가한테는 예민할 수도 있는 것들이더라. 내 안에 반골 기질이 있는 것 같다.(웃음) 특히 젠더, 세대 이슈를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이 크다. 예전에는 그런 분야에 관심을 둔 것 자체로 너무 고통스럽고 화가 났다. 똑같은 사회에 사는 사람들인데 이런 기사에 이런 댓글을 쓰다니, 미친 것 아닌가! 하면서.(웃음) 자중한다고 하면서도 매일 페이스북에 올릴 게시물이 생기던 때가 있었다.

그 심정, 솔직히 이해된다.(웃음)
그랬던 분노지수가 전보다는 좀 줄었다. 현실이 바뀌어서는 아니다. 분노할 일은 전혀 줄어들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계속 분노만 하고 살다가는 스스로 화르르 타서 재가 될 것 같더라. 운동가가 아니라 창작자로 살아갈 거라면 타인에 대한 이해의 문을 완전히 닫아버리면 안 되겠다는 생각도 들었고.

(끄덕끄덕)
물론 고민도 된다. 차라리 더 확실하게 분노해서 저 사람은 나쁘고, 세상은 이렇게 가야 한다! 하는 (방향성이 확실한) 종류의 이야기를 만든다면 사람들에게 더 인기 있지 않을까? 내가 너무 중립적이고 안전한 스탠스를 취하려는 건 아닐까? 싶은 거다. 하지만…


그런 이유로 고민스러울 때, 스스로 어떤 답을 내리나.
내 작업의 초점은 (상처받거나 차별당하는 이들의) 일상이 어떤 시선으로 둘러싸여 있는지를 알게 하는 방향에 맞춰져 있다. <백야>가 그랬다. <메이드 인 루프탑>도 마찬가지다. (성 소수자가) 연애 도중에 어떤 장벽에 부딪히는지 알게 되면서 관객은 나와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 있다. 장르가 로맨틱코미디라고 해서, 극 중 종종 농담을 덧댔다고 해서 그런 본질적인 메시지가 가려지지는 않을 거라고 본다.

지난한 고민의 과정에서 사람들의 마음을 얻을 만한 섬세한 작품이 탄생하리라 믿는다. 앞으로의 작업 일정은 어떻게 되나.
<자이언트 펭TV> 팀에서 진행하는 ‘딩동댕대학교’ 채널의 일을 맡아 진행하고 있다. 웬만한 건 다 끝냈고, ‘인장 선’이라는 캐릭터를 마무리하는 일까지만 하면 된다. 하반기는 취재 단계에 착수한 시나리오 작업을 진행할 예정이다. 성범죄를 따라가는 두 여성 이야기다. 코미디 장르로는 다룰 수 없는 무거운 소재가 될 것 같다. 지금까지 한 작업 중 가장 큰 부담감을 안고 있지만, 실화를 바탕으로 한 매력적인 제안인 만큼 받아들였다.

차기작은 상업 영화로 제작되는가.
그럴 계획이다.

무척 기대되는 프로젝트다. 마지막 질문이다. 최근 소소한 행복을 느낄 때는.
분노와 불안이 많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잿더미가 돼서 나를 소진하고 싶지는 않았다. 외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 자신을 다스리는 것도 필요하다. 예전에는 이런 말을 믿지 않았지만.(웃음) 최근 명상의 효용을 깨달았다. 넷플릭스에서 <헤드스페이스: 명상이 필요할 때>를 보고 따라 했는데 너무 좋더라. 실체 없는 불안의 소용돌이에 빠지지 않으려면 헬스 트레이닝과 마찬가지로 연습이 필요하다. 습관이 되면 평화로운 순간을 만날 수 있다.

사진_박광희 실장(울트라 스튜디오)

2021-06-29 | 글 박꽃 기자 (got.park@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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