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해야 했다” <빛나는 순간> 고두심 배우

2021-06-30|박은영 기자 구독하기

[무비스트=박은영 기자]


‘고진옥’(고두심), 물질도 말발도 따라갈 자 없는 제주에서 으뜸가는 해녀다. 하루의 고된 물질을 끝내고 집에 오는 그를 반기는 건 오랜 기간 병석에 누워 거동도 의사표시도 못 하는 남편과 사진 속 환하게 웃고 있는 딸뿐. 서울에서 온 젊은 PD ‘경훈’(지현우)이 ‘진옥’을 찾아온다. ‘해녀 진옥’을 주인공으로 하는 다큐멘터리를 찍고 싶다고 제안한다. ‘일 없수다’라며 진옥은 단칼에 거절하지만, 이 새파란 청년은 아랑곳하지 않고 ‘진옥이 삼촌~’이라고 부르며, 껌딱지같이 바다로 집으로 ‘진옥’의 동선에 바싹 따라붙는다. 나란히 걷는 길이 점차 자연스러워진 두 사람, 상대의 깊은 곳에 자리한 아픔에 다가간다.

전작 <채비>에서 헌신적인 엄마로 다소 전형적인 캐릭터였다면, 이번 ‘진옥’은 유례없는 캐릭터예요. 어떤 면에 끌리셨나요.
“제주의 혼을 담은 해녀의 이야기라는 점이 일단 좋았고요. 게다가 4.3의 아픈 상처를 감싸 안는 데다 젊은 세대와의 교감과 멜로를 다룬다는 점에 끌렸어요. 좋고 예쁜 작품이라고 생각했죠”

<빛나는 순간>

서로 다른 두 세대, 손을 마주잡다



<빛나는 순간>은 나이 차가 큰 여성과 남성의 사랑이야기이자, 치유의 이야기라고 생각해요. 촬영하면서 어떻게 ‘치유’의 감정을 느끼셨나요?
“물론이에요. 이야기가 지닌 정서도 그렇지만, 고향인 제주에 머물며 촬영한 것 자체가 치유이자 힐링이었어요. 열아홉에 제주를 떠나 계속 서울에서 지나다 보니 방문해도 길게 있지 못했거든요. 그런데 두 달간 머물며 맛있는 고향 음식을 먹고 좋아하는 장소를 다니니 예전의 충만한 느낌이 다시 이어지더군요. 제주도 사투리를 여전히 잘해서 해녀 삼촌들과도 정말 관계가 좋았고요, (제주도에서는 남성 뿐 아니라 여성에게도 ‘삼촌’ 호칭을 쓰는 전통이 있다고 한다) 전혀 모르는 집에 들어가도 밥 주고 재워줄 것 같은 분위기에서 즐겁게 보냈어요.”

‘진옥’과 ‘경훈’ 사이에 오간 감정은 무엇일까요? 남녀 간의 ‘사랑’이라 하기엔 너무 단선적인 정의인 것 같아요. 어떻게 접근하셨나요?
“남녀 간의 사랑으로만 접근한다면 나이의 갭이 커서 공감하기 어렵겠죠. 흔하지는 않겠지만, 간혹 있을 수는 있는 그런 사랑 이야기라고 생각해요. 두 사람이 나눈 사랑은, 아픔을 간직한 인간 대 인간이 만나 점차 알아가면서 싹튼 감정이 아닐까요. ‘진옥’은 아주 어릴 때 부모를 4.3 사건으로 잃고, 딸을 데리고 바다에 나갔다 잃은 깊은 한과 트라우마를 지닌 인물이에요. 이런 비극적인 삶의 고비를 묵묵히 견디며 살아온 사람이죠.”

“그가 신출내기 ‘경훈’을 만나 한눈에 꽂혀 사랑에 빠졌을까요? 그럴 순 없죠. 멀쩡히 잘 살아온 것 같이 보이던 ‘경훈’ 역시 아픔을 지닌 사람이라는 걸 알고, 뭔가 그가 치유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겠냐는 생각에 손을 내밀며 점차 감정이 깊어지게 된 거죠. 처음에는 진옥이 젊은 경훈을 돕는다고 생각했는데 점차 진옥도 위로받고 치유됐다고 생각해요.”

<빛나는 순간>


해녀는 제주의 정신이자 혼, 내가 해야 했다.



소준문 감독이 각본과 연출을 맡은 <빛나는 순간>은 제주도 올로케이션으로 촬영했다. 고두심 배우를 염두에 두고 시나리오를 썼다고 밝힌 소 감독은 ‘고두심은 영화 그 자체’라고 말한다. 배우에게 이 이상 큰 칭찬이 있을까.

어떤 마음으로 영화에 참여하셨나요?
“일단, 감독님이 ‘제주도 하면 고두심, 고두심은 제주도의 얼굴’이라면서 손편지를 써 주는데 거절할 이유가 없었죠. 게다가 나를 염두에 두고 시나리오를 쓴 데다 내가 안 한다고 하면 덮으려고 했다 하니 안 할 수가 없잖아요?” (웃음)

“해녀는 제주의 정신이자 혼이에요. 그렇기에 내가 해야 할 것 같았어요. 우리 영화에서 진옥-경훈, 남녀의 사랑은 일부이지 전부가 아니에요. 영화에서 4.3 사건을 담는 장면이 있어 특히 감동받았고요, 그렇기에 더욱 해야겠다고 생각했죠.”

52년생이라고 밝힌 고두심은 1948년에 일어난 4.3 항쟁을 마치 직접 목격한 듯이 느껴진다고 한다. 그만큼 생생하게 듣고 자랐다고. 또 어릴 때 부모의 손을 잡고 방문한 친척 집에서는 한날 한시에 여러 명의 제사를 지냈다면서 얼마나 무섭고 기가 막힐 일이냐고 묻는다.

제주도 출신이나 오래전 떠났는데 사투리가 어색하지는 않으셨나요?
“전혀요. 가족끼리 사용하는 데다 친구들을 만날 때는 늘 제주도 말을 써요. 서울말 하면 안 놀아줘요. (웃음) 그렇게 사투리를 계속 사용해왔는데 촬영하는 두 달간은 정말 원 없이 썼네요.”

흔히 접하지 못하고, 뜻을 알 수 없는 사투리가 정말 많더라고요. 자막이 있어 다행이었어요. (웃음)
“어차피 자막 처리가 되니 옛날 언어, 그러니까 할머니들이 쓰는 단어를 사용하려고 했어요. 제주에서도 서귀포와 제주시가 쓰는 단어가 다를 정도로 그 말이 다양해요.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싶은 마음에 제주에서도 드문 단어를 더 찾으려고 노력했죠.”

체력적으로도 힘들었을 것 같아요. 또 직접 연기해보니 해녀의 삶이 체감되시던가요.
“솔직히 힘들었어요. 익숙하지 않으니 더 그렇죠. 망사리(해녀들이 드는 그물망)가 비어 있어도 무게가 꽤 나가거든요. 근데 거기에 전복, 소라 등 채취한 해산물이 꽉 들어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래서 해녀분들이 물에서 나오면 동네 청년이나 아들, 남편, 아버지 등 남자 가족이 그 망사리를 들고 가는 걸 종종 볼 수 있어요.”

<빛나는 순간>


해녀도 ‘여자’



흔히 해녀는 강하고 억척스럽다고 여겨지는데요. <빛나는 순간>은 이외에 소녀 같은 면이 부각돼요.
“해녀는 여자 아닌가요? 나이 70을 바라보지만, 나 역시 ‘여자’라는 사실을 못 놓겠어요. 육체적으로 정말 힘든 직업이지만, 그렇다고 해남은 아니잖아요. 여자는 직업과 나이, 지위에 상관없이 여자라는 끈, 즉 ‘여성성’을 놓지 않는 존재라고 생각해요.”

‘경훈’역의 지현우 배우와는 호흡이 어떠셨나요?
“사실 어떤 젊은 친구가 캐스팅될지 궁금했어요. 지현우는 시나리오를 받고 본인은 이해되는데 관객도 이해하겠냐는 생각이 들었다고 하더군요.”

“처음 볼 때는 여리여리하다고 생각했는데(비주얼 때문에) 촬영하면서는 그런 생각이 싹 사려졌어요. 남성적이고 단단한 면이 있는, 외유내강 스타일이에요. 새벽에 혼자 나가 먼저 해녀 삼촌들께 인사하고 교감하면서 점차 친해지더군요. 후배지만 배울 것이 있다고 생각했죠.”

<빛나는 순간>


지현우 배우에게 재밌는(?) 에피소드를 물으니, 진옥-경훈이 바다로 들어가는 장면을 촬영할 때 ‘슛’ 소리가 나자마자 ‘각자 살아남자’라고 하셨다고요.
“그게 사실 물을 무서워해요. 중학교 때 바닷물에 휩쓸려 가서 죽을 뻔했던 트라우마가 있거든요. 영화 <인어 공주>(2004) 찍을 때도, 그때는 동남아에서 촬영했는데요, 간단한 자맥질 한 번 하면 되는 데 내가 새파랗게 질리니 감독님이 결국엔 대역으로 갔거든요.”

“근데 이번에는 ‘진옥’의 바다 장면이 많아 대역을 쓰기는 무리잖아요. 그래서 이번 기회에 물에 대한 공포를 없애고 무조건 해내겠다는 각오로 이를 악물었죠. (웃음) 한편으론 내 주위에 상군 해녀들이 잔뜩 있으니 빠져도 어떻게든 끄집어내 줄 걸 아니 안심도 됐고요. 글쎄, 감독님이 OK 했는데 내가 좀 더 찍겠다고 한 적도 있다니까요. 이게 물의 리듬감을 타기 시작하면 맛이 들려요. 덕분에 현장에서 큰 웃음이 나기도 했어요.”

‘해녀는 바다를 떠나서는 살 수 없다’고 평소 말하던 진옥이지만, 경훈과의 미래를 꿈꿔본다. 태어나 평생을 산 제주를 떠나 경훈과 함께 서울행을 결심한 그는 마지막으로 집안을 둘러본 후 경훈이 기다리는 공항으로 가려는데. 과연 진옥은 제주를 바다를 떠날 수 있을까.

진옥이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요.
“음, 영화 속 그대로요. 평생 물질을 한 사람인데 어디가서 다른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또 아픈 남편을 두고 떠날 수 없다는 건 본인이 더 잘 알고 있죠. 개인적으로 마음에 드는 엔딩이에요. 보낼 사람은 보내고 남아야 할 사람은 남는 거요.”


내 인생의 빛나는 순간은…



혹시 여전히 연기적인 고민이 있으신가요. 우문을 던져봅니다.
“당연하죠, 가끔 어떤 역을 하고 싶냐는 질문을 받을 때, 하고 싶다고 주어지는 것도 아니지만요.(웃음) 어떤 역을 맡든 내가 어떻게 그 인물이 될지 항상 고민해요. 경험을 바탕으로 연기하면 좋겠지만, 실제로 경험하지 못 하는 일이 더 많잖아요. 그래서 귀동냥이나 책, 또 사람의 행동(움직임)을 관찰하며 익혀 나가곤 해요. 예전엔 간혹 새벽시장에 나가곤 했어요. 다양한 일을 하는 사람이 여럿 모이니 그분들을 보면 도움이 많이 되거든요. 예를 들면, 떡 파는 사람, 물건을 나르는 사람 등 저마다 손의 위치와 표정, 움직임이 다 달라, 유심히 보고 나중에 연기할 때 써먹어야지 했어요.”

얼마전부터 imbc 채널에서 <전원일기> 다큐멘터리가 방영되고 있어 화제예요.
“오랜만에 동료를 만난 것은 좋았지만, 단순히 세월의 흔적을 보여주는 것 같아 첫 회는 씁쓸하기도 했어요. 시청자들에게 추억을 소환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을까도 싶고요. 어떤 의미가 있었으면 하거든요. 내게 그 답을 묻는다면 딱히 표현하기 힘들지만요.”

“시청자가 왜 좋아할지를 생각해봤는데요, (김) 혜자 언니의 말에서 약간 힌트를 얻었어요. 요즘 드라마는 파헤치고 아픔을 드러내는 반면, <전원일기>는 보듬고 같이 걸어가는 모습을 보여주려 하는 드라마라는 거죠. 공감해요. 농촌 드라마라기보다 그 시대의 아름다운 풍속과 생활상을 담은 드라마라고 생각해요.”

요즘 소소하지만, 행복한 일이 무엇인가요.
“손주 보는 재미요. 예전에 혜자 언니가 손주가 너무 예쁘다고 하길래, ‘뭔 여배우가 이래?’ 라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내가 그러고 있네요. 만나는 사람마다 막 먼저 사진 보여주고, 말이죠.”

마지막 질문입니다. 연기적으로나 혹은 개인적으로 ‘빛나는 순간’을 꼽는다면요.
"연기자로서 말한다면, 연기력을 인정받아 상을 받고 내가 출연한 작품이 시청자에게 큰 사랑을 받으면 그만큼 기쁘고 좋은 게 없겠죠. 한마디로 희열이 느껴져요. 개인 고두심으로 가장 빛나는 순간은 아이를 잉태했을 때예요. 스스로 아주 신기한 경험이었고요. 또 남편을 비롯해 친척, 친구의 주목과 사랑을 한 몸에 받는 그때가 정말 ‘빛나는’ 순간이었어요."



사진제공. 명필름

2021-06-30 | 글 박은영 기자 (eunyoung.park@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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